『일본에 있는 동안 반일에도 혐한에도 관심갖지 말라. 한·일 양국이 아시아 공동체라는 인식아래 힘을 모아서 서양과 경쟁할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면 아시아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일본과 한국 대만 등이 만드는 컴퓨터 등 첨단제품은 서양의 소프트웨어를 더 빨리 더 널리 전파하는 수단이 되고, 아시아는 점점 더 서양문화에 예속되고 있다. 두 나라는 과거를 보지말고 미래를 봐야 한다』서울을 떠날 때 이어령 선생님은 이런 조언을 주셨는데, 자주 그 말을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초·중·고에 다니며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고, 부모로부터 식민지 체험을 들으며 자란 우리 세대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 일본인들의 장점에 감탄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다가도 계기만 있으면 적대감이 튀어나와 축적된 호감이 단숨에 날아가기도 한다.
지난 주엔 그런 문제로 생각을 많이 하며 지냈다. 첫 충격은 아사쿠사(천초)에서 산자마쓰리(삼사제)를 구경하다가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늘 어디에선가 마쓰리(제)가 열리고 있다고 할만큼 지역마다 고유의 축제를 보존하여 즐기고 있는데, 산자마쓰리는 도쿄의 3대 축제중 하나로 1,000여명의 참가자와 수만명의 인파가 모여 사흘동안 대성황을 이루었다.
개인으로 보는 일본인과 집단으로서의 일본인은 다르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데, 마쓰리에서 새삼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심조심 질서와 예절을 지키는 일본인들을 보고는 상상하기 힘든 야성적인 집단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다. 흥겹고 목가적인 우리나라의 축제들과는 어딘지 다른, 섬뜩한 그 무엇이 있었다. 벌거벗다시피 몸을 드러낸 마쓰리 옷차림의 남자들이 가마(신여)를 메고 구령을 외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무슨 피해의식일까.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저들에게 우리 선조들이 짓밟혔구나. 저들의 총칼에 쫓기며 독립운동을 하고, 친일을 하고, 절망과 공포와 굴욕을 삼켰구나. 낭자하게 피가 솟구치는 환상을 지우려고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음날인 19일 저녁 김매자의 춤을 보았다. 아카사카(적판) 국제교류 포럼의 극장은 대만원이었다. 계단에까지 차곡차곡 끼여앉은 관중은 숨소리를 죽이고 춤에 몰입했다. 종교의식에 참가한 신도처럼 경건하고 탐미적인 일본인들이 거기 있었다. 6개월간 이곳에서 일본 춤을 연구한 김매자씨는 그의 대표작인 「숨」과 「춤본」, 전통춤 「살풀이」를 선보였다. 일본의 캉(능관·피리)과 북, 한국 가야금의 즉흥연주에 맞춰 춘 「춤본」은 두 나라의 춤과 소리가 서로를 더 풍요롭게 한 극적인 무대였다.
『일본춤을 공부하면서 한·일 두나라의 춤은 저 깊은 바닥에서 호흡과 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음악에 맞춰 춤출 때 뭔지 모를 어떤 힘이 내 춤에 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의 춤이 세계 춤무대의 중심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그는 공연후의 좌담회에서 말했다.
21일 저녁 한·일 축구전이 열리는 요요기(대대목) 국립경기장에 갔다. 2002년 월드컵을 함께 치를 두 나라, 공동개최가 마음내키지 않는 두 나라가 벽을 녹이려는 친선전 시리즈의 첫 경기다. 찬 밤바람속에 스탠드를 가득 메운 팬들의 열기가 뜨거웠지만, 선수들도 응원단도 과열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후반 11분 유상철이 헤딩으로 선제골을 터뜨렸고, 경기종료 2분전 일본의 미우라가 페널티 킥을 성공하여 경기는 1―1로 비겼다.
22일자 일본신문들은 <친선으로 비겼다… 동반관계를 시작하는 페어플레이… 일·한 협조 무승부…> 등의 제목을 뽑았다. 그리고 왕년의 일본 대표선수로 한국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기무라 가즈시(목촌화사)의 말을 인용했다. 친선으로>
『너무 가까워서 싸우는 나라, 서로 싸우며 실력을 향상시켜 월드컵 공동개최에 성공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날 밤 경기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마쓰리, 김매자의 춤, 한·일 축구전을 보며 느낀 나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너무 가까워서 싸우는 나라, 우리가 잠자지 않도록 늘 자극하고 도전하는 나라,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경제발전의 교과서를 가진 나라. 일본이 우리의 이웃임을 이제 왜 싫어할 것인가.<장명수 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장명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