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한승원,혹은 그 야만 속에서의 돌연변이/‘무지의 땅’ 아버지 고향싸고 세대간 갈등과 화해 그려「고향」이라는 말이 우리 시대, 예순을 눈 앞에 둔 아버지와 이십대 후반의 아들에게 각각 던져주는 의미란 어떤 것일까. 『아버지의 그 자전적인 소설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무덤」이었다… 나는 그 고향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밤에도 불이 꺼지는 법이 없는 도시이며 캄캄한 바닷가 외진 마을은 아버지의 고향일 뿐이지 내 고향은 아니라고 부인해버리면 그뿐이었다』
소설가 한승원(58)씨는 지난해 9월 고향인 전남 장흥군 회진포에서 30여㎞ 떨어진 안양면 율산리 바닷가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글을 쓰고 있다. 그 첫 작품이 내주중 문학동네에서 출간되는 「해산 가는 길」. 고조부대부터 자신의 중학입학 직전까지 고향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유년시절의 눈과 현재의 시각을 교차시켜 쓴 자전적 소설이다. 한씨가 고향 이야기를 썼다는 소식을 듣고 소설가인 아들 동림(29)씨는 「무덤」을 떠올렸다. 그도 9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전업작가. 올해로 등단 30년째인 한씨는 자전소설의 「발문」을 아들에게 맡겼다. 한씨의 딸 강(27)씨 역시 장편 「여수의 사랑」 등을 발표한 소설가. 모녀, 부부, 형제 소설가가 있긴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딸이 소설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경우는 우리 문단에서는 지극히 드물다.
「해산」은 실제 그 곳 바닷가에 솟아 있는 산 이름이자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가시적 산」을 가리키는 이름인 동시에, 작가가 증조부에게 증정한 호이자 자호이기도 하다. 「해산 가는 길」은 『나 스스로에 대한 탐구작업의 결과 나온 개안소설』이라는 것이 한씨의 말이다.
「밤이면 술 취한 사람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거슴츠레 뜬 채 구불구불한 어두운 골목길을 쏘다니는 곳, 어디선가 그릇들이 깨져나가고 여인네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는 곳,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간밤의 난동은 마치 꿈인 양 모두 잊어버린 사람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태평하게 아침을 먹는 곳」. 동림씨에게는 어릴적 가끔 따라가 본 아버지의 고향은 이런 「짐승 같은, 그 무지와 혼돈의 땅」으로 각인돼 있다. 이것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고향의 어느 정도 공통된 모습일 수 있다.
한동림씨는 이런 땅에 종내 집착하는 아버지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내 아버지 한승원, 혹은 그 야만 속에서의 돌연변이」라 제목 붙인 발문에서 고백한다. 아들은 그러나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애정, 그 근처에 집필실을 마련하고는 『나 여기서 죽을란다』라고 한 그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아버지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 힘의 정체는 자궁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야만의 피가 아닐까. 여태까지 아버지는 그 피의 근원을 찾아 궁극의 대상으로서 고향을 지목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작가)는 고향이라는 이름의 자궁을 향하는 길고 긴 여정을 영원히 끝낼 수 없을 것이다』 「해산 가는 길」은 소설 자체만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세대간의 「고향」에 대한 갈등과 화해를 보여주는 한 편의 작품으로서도 흥미롭다.
한승원씨는 『아들이 아버지세대 고향의 이야기에서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며 『그러나 아버지가 자라나온 곳이 늪이라면 아들의 삶은 그 늪으로부터 꽃 피우기』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기를 거쳐 문단 등단까지의 이야기를 쓸 다음 자전소설의 발문은 딸에게 맡길 작정이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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