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5년 최윤덕 앞세워 기습작전/15,000조선군 기세에 혼비백산/폭우위기·중신 반대 물리치고 치밀한 준비로 파저강일대 초토화1433년 세종 15년 음력 4월19일, 파저강은 막 긴 잠에서 깨어났다. 땅과 하늘이 맞닿은 가없는 만주벌 파저강 일대는 순간 짙은 전운에 휩싸였다. 여진정벌의 중책을 짊어진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당시 57세)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정벌군은 추장 이만주와 소추장 임할라 등이 할거하고 있는 야인의 본거지를 기습했다. 화포가 일제히 불을 토해내면서 적의 혼을 빼냈다. 포연이 가시기가 무섭게 조선군의 기·보병이 적을 베어나갔다. 본격적인 여진정벌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여러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던 조선군 후속부대가 최윤덕의 본진에 합류했다. 조선의 기·보병 1만5,000병력은 이만주와 임할라의 본거지를 차례로 초토화시켰다. 전과는 참살 183명, 생포 248명, 노획한 소·말 177마리, 병기 1,200여점에 달했다. 우리측은 4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을 뿐이다. 야인의 저항도 빈틈없는 작전과 드높은 사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앞서 4월10일 정벌군은 일제히 압록강을 건넜다. 군사들은 부교를 통해 만주땅을 밟았고 화포는 배로 날랐다. 입하도 지났건만 만주벌의 북풍은 살을 엘듯 차가웠다. 뼈속을 파고드는 한기도 군사들의 사기를 꺾지는 못했다.
이것이 제1차 야인정벌, 즉 계축북정이다. 파저강은 지금의 중국 랴오닝(요녕)성 훈강(혼강)일대를 말한다. 세종 1년(1419년) 상왕 태종이 병선 227척과 병력 1만7,200여명을 동원한 대마도 정벌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었다. 동원된 병력이 1만5,000명이라지만 당시 인구와 경제력을 감안하면 현대의 군급 이상의 대작전이었다.
정벌이 실패로 끝날 위기도 극복해야 했다. 위기는 적과 자연으로터 동시에 왔다. 적이 불을 질러 목초를 다 태우자 폭우가 계속돼 강물이 넘친 것이다. 말들은 힘이 빠지고 작전은 커녕 야영조차 어려웠다. 이 때 최윤덕은 폭우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하늘이시여… 저들의 죄악을 응징하고자 하는데 어찌 죄지은 자는 감싸주고 무고히 저희를 괴롭히십니까? 윤덕에게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기도가 하늘에 사무쳤는지 곧 비도 그쳤다.
정벌의 발단은 4개월전 여진족 400여기가 압록강을 건너 여연(지금의 평북 중강진)을 습격, 주민 75명을 잡아가고 48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세종은 대노했다. 『파저강의 도적들은 임인(1422)년에도 여연을 침략했다. 그 뒤 다른 부족에 쫓겨 압록강 가에 살기를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허락했다. 그런데 은혜를 저버리고 까닭없이 쳐들어와 양민을 죽이고 잡아가니… 이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이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1433년 1월19일 최윤덕 등이 하직인사 할 때 내린 훈시).
야인은 만주 동부에 살아온 퉁구스계통의 민족으로 시대에 따라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이라고 했는데 훗날 추장 누르하치(노아합적) 주도로 중국을 통일, 청나라를 세운다.
당시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서정록(1516년 중종 11년 6월 간행)은 세종의 주도면밀한 준비를 엿보게 한다. 세종(당시 37세)은 여진족을 추격하다가 명나라 직할경계까지 진격하게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를 미리 해결했다. 또 첩자를 보내 작전지역 여진족의 종류, 지형, 교통로 등을 상세히 파악했다. 최윤덕에게 당부한 장병행동지침에서는 『늙은이와 어린이를 죽여서는 안되며 여자포로는 군사들과 섞이지 않도록 별도로 수용하라. 토벌은 정의로 불의를 무찌르는 것이니 피아간에 희생을 줄이고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의로운 군대가 취할 최상의 목표』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치밀함 덕분에 『토벌작전이 득보다 실이 많으며 수고만 크고 전과를 얻지 못해 적에게 비웃음만 당하지 않을까 두렵다』(영의정 황희)고 하는 상당수 중신의 소극적 자세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여만인 세종 18년 1436년 5월 여진족 기병 500여기가 또 조명간(평북 자성군 장토면)에 침입, 주민 14명을 납치하고 말과 소를 약탈해갔다. 세종 19년 1437년 9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이 천이 군사 7,800명을 거느리고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8일간의 작전에서 적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60명, 우리 피해는 전사 1명이었다. 2차 야인정벌(정사북정)로 이만주는 명나라 변방 훈하(혼하)상류 소자하반으로 달아났다.
◎돋보기/최윤덕과 세종/소시적 호랑이 잡은 타고난 무인/대마도·야인정벌후 우의정 특진/세종 두터운 신임 ‘궤장’ 하사도
최윤덕은 무장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도 고려말 장수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이 컸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쏴 소에게 꼴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잡아왔을 정도다.
아버지를 따라 여러차례 전공을 세우고 1410년 무과에 급제했다. 1419년 삼군도통사로 도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했다. 파저강 야인정벌의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된 후 『무관으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감으로서 탁월한 자질을 일찍 알아보고 임금에게 적극 추천한 사람은 당시 대언(지금의 수석비서관) 김종서였다.
최윤덕은 이후 좌의정에 이어 영중추원사에 임명된다. 영중추원사는 오늘날의 원수에 해당하는 무관 최고위직으로 세종이 그를 위해 파격적으로 신설한 자리. 세종은 그가 죽기 얼마전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 궤장(장·팔을 기대는 도구와 지팡이)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공평청렴, 근면검소하여 여가에는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한번은 평안도 변방에 부임했을 때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준 일도 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의지하기를 『장성같이』했다.
◎세종어록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이루지 못하나, 어렵게 여겨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는 법이다』(세종실록 38권 9년 12월8일조. 칠원현감으로 떠나는 양봉래에게 흉년구제를 잘 하라며 당부).
『하늘의 뜻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으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라』(실록 52권 13년 5월2일조. 정속이 하직인사 왔을 때 가뭄을 걱정하면서 한 말).<이광일 기자·제자 안상수 교수(홍익대)>이광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