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본 사람이 없다. 열두개의 지지중에는 여러가지 짐승들이 끼여 있지만 용이라는 동물만은 가상의 동물이라고 한다.그래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이라고 하고, 시작은 훌륭했으나 끝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용두사미」라는 말을 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의 뜻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거드름을 부리느라고 일부러 하는 트림을 「용트림」이라고 한다.
교도소처럼 영치금의 액수에 따라 계급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사회는 없다. 영치금의 액수가 재소자의 재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최상의 실력자를 「용털」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교도소로서도 크게 영광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거액의 영치금을 가진 죄수를 「범털」이라고 하는데 어지간한 존경의 대상이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죄수를 「개털」이라 하고,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사고무친의 가난뱅이를 「쥐털」이라고 한다. 교도소안의 천덕꾸러기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동물들의 순위에서 「용」이 제1위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여당인 신한국당 내의 이른바 「대권주자」를 용이라고 하는가. 누가 먼저 감히 그런 엄청난 용어를 멋대로 구사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처음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라고 여당의 대통령 지망생들을 지칭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용이 우리 눈앞에 그렇게 여러 마리 날뛰고 있다는 자체가 불길한 일이다. 그중에 한마리가 병들어 떨어졌다면 여덟 마리도 엄청 많은데 어쩌자고 그 자리에 또 한마리가 올라와 붙는가 말이다. 『저런게 다 용이라면 나라고 용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듯 그 뒤에도 또 올라붙고 또 올라붙으니 이 많은 용들을 어떻게 하나의 정당이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열도 더 된다는 용들의 공중전을 지켜보면서 국민도 지치고 나라도 피곤하다.
미국같이 크고 넉넉한 나라에서도 합법적으로 치러지는 정당의 예비선거가 낭비라고 아우성인데 우리처럼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이런 엄청난 출혈을 과연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선을 공정하게 치르도록 하는 법도 하나 없는 판이라, 저마다 무슨 모임이니 무슨 연구소니 하는 것들을 차려놓고 사전선거운동에 정신이 없는 것만 같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런 용들의 싸움으로 생긴 불을 끌 생각은 않고 옆에서 오히려 부채질만 하는 언론도 얄밉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공천을 따낼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인 줄을 뻔히 알면서 왜 신문과 텔레비전에다 그렇게 크게 얼굴들을 비춰 주며 말을 하고 또 하게 하여 가뜩이나 사는 일이 고달프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국민정서를 어지럽게 만드는가. 이렇게 야단스럽게 구는 언론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
여당의 총재인 대통령이 15대 대통령 후보공천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언한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아드님이 수감되고 92년의 대선자금 공개문제가 시끄럽다 하여도 총재는 당당하게 의중의 인물을 만천하에 공표하여 당내 경선의 과열현상을 사전에 방지했어야 한다. 모든 집단의 장자리를 놓고 후계자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자리를 친구에게 물려준 전두환씨가 백담사에 유배되는 비극을 목격하면서 후계자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나는 오래전에 생각하였다. 후계자를 옳게 지명하였던들 전직대통령이 오늘 안양교도소 감방에서 무기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의 영원한 회전을 지켜보고 앉았겠는가.
잡음이 일체 일지 않도록 올바른 후보의 손을 처음부터 꼭 붙잡아주어 어차피 등극하여 날 선 칼을 뽑아들게 될 한 시대의 풍운아를 적극 두둔하고 밀어 주었던들 6공의 제1인자였던 전직대통령 노태우씨가 오늘 의왕에 있는 구치소에서 17년의 긴 세월을 일각이 여삼추라는 옛말을 되씹으며 고통스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앉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15대 대통령 후보로 그가 만들고자 마음 먹고 있는 인물 한 사람의 이름을 당원들과 국민앞에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한국당내의 이 많은 용들의 분별없고 낭비적인 싸움을 그만하게 해야 한다. 아무리 당이 지명하고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기는 하지만 현직 국가원수의 뜻에 가장 큰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청와대를 물러난 뒤의 일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믿는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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