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언급땐 정국불안 단초 판단/장고끝 우회돌파 국민납득 의문김영삼 대통령이 23일 마침내 92년 대선자금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국민에 대한 완곡한 사과표시와 함께 『구체적 자금내역은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어서 향후 정국의 또다른 불씨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김대통령은 이날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정서를 알고 있지만 5년전 대선자금에 대해 밝힐 만한 자료가 없어 안타깝고 국민에게 송구스럽다』는 짤막한 한마디로 입장표명을 대신했다. 당초 예상됐던 고위당정회의 등 공개석상도 아닌 이회창 대표의 청와대 주례보고를 듣는 자리에서였다.
김대통령은 대선자금 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사태수습의 계기가 되기 보다는 오히려 정국불안의 단초가 될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것도 가급적 자신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후유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 듯하다. 사실 여권핵심부는 그동안 입장표명의 내용과 수위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왔다. 『자금내역의 공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는 인식이 같았지만 법정한도 이상의 선거자금 사용을 시인해야 할지, 아예 『퇴임후 문제가 드러나면 책임지겠다』는 식의 고단위 「충격요법」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할지를 놓고 여러 갈래의 의견이 대두됐었다. 결국 김대통령은 장고끝에 「가장 소극적이면서 역으로 가장 충격적인」 접근방식을 택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로써 이 문제에 대한 김대통령의 대응은 일단 끝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김대통령이 이를 분수령으로 가시화할 정국운영구상과 야권의 대응, 그리고 여론의 향배에 모아지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공직사회에 대한 사정작업이 대선자금 입장표명후 김대통령의 「후속조치」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어차피 대선자금문제로 인한 여야간 충돌이 불가피한 이상 국면을 사정정국으로 몰아가는 강수를 구사, 야권의 공세를 무디게 하고 여론의 시선을 돌려 대선정국 전환을 위한 계기를 잡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당장 야권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야권일각에는 한동안 잠잠했던 김대통령 하야론까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여기에 김대통령 스스로도 인정했듯 대선자금에 대한 「국민적 의혹」도 간단치 않다. 이때문에 앞으로 사태추이에 따라서는 김대통령의 2차 입장표명이 나올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여권내부에는 당사자인 김대통령이 직접 대선자금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이대표를 내세운 사실을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이날 언급이 진일보된 입장표명 가능성을 염두에 둔 「여론탐색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선자금에 대한 김대통령의 첫 입장표명은 상황의 종결을 가져오기 보다는 또 한번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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