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통령 지도력 위기는 오히려 박 대통령의 권위적 통치스타일을 답습한 때문은 아닌가최근 김영삼정부의 지도력이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의 신화가 부활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민족애, 결단력, 청렴강직 등이 고도경제성장기의 초석을 마련했고, 오늘에도 다시 그와 같은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국가기간시설의 건설, 수출주도 경제성장,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등 뚜렷한 정책목표와 일관된 정책추진으로 국가건설의 중추적인 역할을 도모한 박대통령에 대한 복고적 찬양론이다. 또한 강직한 성격으로 개인적인 비리와는 무관했다는 평가가 신화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사실 박대통령의 지도력에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박대통령의 독재정치와 인권탄압을 지적하고, 박대통령 암살후 탄생한 5공, 6공의 왜곡된 정치사, 재벌중심의 경제구조, 지역갈등의 심화로 한국사회를 주름지게 한 문제 등을 적시하지 않더라도 박대통령의 공적에는 분명한 명암이 존재한다. 게다가 지난 경제성장의 공적을 근로자, 기업가, 관료들을 제외하고 지도자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도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대통령 신화를 부각시켜 복고적 정치지도력의 회귀를 갈망할 것이 아니라 민주화시대에 적합한 정치지도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일이다. 즉 민주화시대의 지도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박대통령과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력을 다시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시대적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김대통령이 박대통령과 유사한 통치스타일을 답습했기 때문에 지도력의 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닌가.
김대통령도 박대통령과 같이 독선적인 애국심과 권위적 통치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박대통령의 막걸리로 상징되는 서민의식은 김대통령의 칼국수, 골프 금지 등으로 나타났고 새역사 창조, 유신, 중단없는 전진 등의 구호는 신한국 창조, 역사 바로세우기, 지속적인 개혁 등으로 부활했다. 정책운영도 관료조직보다는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참모중심 운영, 전격 인사조치, 연말 개각, 정책결정의 비공개성 등 유사한 형태를 보여왔다. 심지어 노동법 강행처리는 박대통령시대의 여당 중심의 날치기 통과와 같은 국회운영을 너무 닮아 있었다.
한가지 차이는 박대통령은 18년이라는 장기집권을 했고 집권당시 임기말이라는 단어가 없었지만 김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임기가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유신시대와 민주화 이후의 시대는 정치제도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지지율의 급전직하와 지도력의 붕괴는 민주화시대의 정치를 구시대의 통치스타일로 운영했기 때문에 나타난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권위적 지도력은 권력의 기반이 약화할 때 급속한 지반침하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박대통령 시대에도 정치자금의 비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내용들이 공개되지 않는 정치체제하에 있었을 뿐이다. 민주화시대의 정치비리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직 대통령 아들이 구속될 수 있는 정치체제의 공개성에 차라리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할지 모른다. 경제위기의 문제도 한국 경제가 선진국 경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의 거품을 빼기 위해 겪어야 하는 진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민주화시대의 정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지도자의 정치력보다는 사회 각계의 전문성에 의존하여 문제를 풀어야 한다. 더 이상 강력한 지도력과 카리스마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기에는 우리 사회는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민주화시대의 정치지도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강조하는 구시대적 지도력보다는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선과 완전한 합리성을 가진 지도자를 구하기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조정할 수 있는 조정자가 더욱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박대통령의 신화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보며 언젠가 고교은사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해방된 다음해 보릿고개를 맞이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일제때는 굶지는 않았는데…』
구관이 명관이라는 격언은 시대의 변화를 냉철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단순한 착각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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