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직유들에도 불구하고/삶의 어떤 공허를 보고 있는 듯송재학의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간)는 현란하고 섬세한 이미지들이 들끓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나비무늬가 그런 것처럼, 이미지들은 어떤 관념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자립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 해서, 시 안에서 의미의 논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시들은 특히 색채에 대한 묘사에서 인상적이다. 가령 곳곳에서 나오는 분홍색은 어떤 특정한 관념을 대신하는 기호는 아니지만, 절대적 이미지도 아니다. 「흰색과 분홍의 차이」에서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라고 한 뒤, 다시 「분홍은 병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 숲이 울고 있는 흔적,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라고 쓴다. 시인은 분홍에 자신의 시적 자의식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흰색의 정형적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감각을 갱신하려는 욕망의 색채다.
「초록」은 어떠한가? 「풀잎」이라는 시에서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 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 수 없는/ 오랑캐 들판/ 그 넓이만큼 죽음이나 여름을 만난다」고 노래한다. 초록은 운명의 빛깔이다. 풀잎은 초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풀잎 안에서야 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 때를 알고 있다」. 분홍색과의 대비로 초록을 읽는다면, 초록은 사물 안에 웅크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런 의미에서 초록의 관념은 차라리 서늘하다.
현란한 직유들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어떤 공허를 보고 있다. 공허야말로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하는 관념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가령 「삶이란 살 속에 파묻은 고무 호스 통해 빨아들인 몇 밀리미터의 공기를 몸의 칸수만큼 천천히 나누는 일」(「노인」에서)이라고 쓸 때, 삶은 더 이상 화사하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이 모두 공허에 바쳐지지는 않는다. 시인이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상, 시는 여전히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씻어낼 것이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서울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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