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대통령께 드립니다(동창을 열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대통령께 드립니다(동창을 열고)

입력
1997.05.19 00:00
0 0

5월18일자 조간신문마다 둘째 아드님이 구속되어 검찰 승용차에 실려 구치소로 가는 모습을 찍어 1면 톱기사로 실었습니다. 그 사진의 설명을 모 일간지에서는 이렇게 써서 그 밑에 붙였습니다.『구치소 가는 길―기업인에게서 65억5,000만원을 받고 증여세 13억5,000만원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되는 김현철씨가 17일 저녁 굳은 표정으로 검찰 승용차를 타고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그 사진을 보고 그 기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먼저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대통령의 얼굴이 제 눈 앞에 크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런 느낌에 잠시라도 사로 잡힌 사람이 이 땅에 저 혼자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한갓 값싼 감상의 순간이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진을 보는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함이 스치고 지나갔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감의 한 순간이 이 나라의 헝클어진 정치와 무너진 경제를 바로 잡아세우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한 평생 아들이건 딸이건 낳아서 키워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 딸을 낳아 키우는 어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잘라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40이 넘고 50이 넘을 때까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살아 온 사람이기때문에 부모의 자식을 향한 애정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쟁중에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제주도 모슬포의 신병훈련소에 가 있을 때 저의 늙으신 아버님이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며 공연히 눈물짓던 그 처량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일가친척들이 있습니다. 제가 남산에 도사리고 있던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통행금지시간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에는 저의 어머님께서 대문을 열어놓고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랑이 지극하다해도 부모와 자식사이의 사랑처럼 지극하겠습니까.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천명도 더 되고 만명도 더 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이 땅에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시절에는 저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자부합니다.

제 누님이 살아계시던 시절에는 저희 집에 냉면을 잡수시러 오신 적도 몇번 있었고 해마다 멸치 한 포를 선물로 보내주신 일도 잊지 못합니다.

민주산악회 인사들과 조령산에 등반가셨다가 새재 기슭에 자리잡은 저희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한 일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른바 「3당 통합」의 그날부터 오늘 새벽에 배달된 조간신문의 그 사진과 그 기사를 읽을 때까지 대한민국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김영삼 대통령을 가장 미워한 사람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저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는 구구한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그래도 저를 14대 총선때 강남 갑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시켜 국회로 보내준 통일국민당을 『태어나지 않아야 할 정당이 태어난 것』이라고 매도하셨을 때 격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당은 완전히 무너졌고, 저는 고아처럼 헤매다 정치판을 영영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후 단 한번도 청와대에 초대받아 가 본 적이 없고 그 흔하고 값싼 칼국수 한 그릇도 얻어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새벽을 기점으로 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 뉘우침과 절망에 사로잡혀 「잠 안오는 밤」을 보내셨을 김현철씨의 아버님이신 김영삼 대통령 편에 서겠습니다. 저도 대통령께서 믿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대통령께서 섬기시는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주일이라 몇사람이 제 집에 모여 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두가 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며 대통령께서 건강하시어 국민과 역사 앞에 의로운 결단을 내리실 수 있기를 위하여 한마음으로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심을 의심하는 일이 없기를 빌며, 1997년 5월18일 아침 김동길 삼가 드림.<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