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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지금 그 깃발은…/비극의 그날이후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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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지금 그 깃발은…/비극의 그날이후 17년

입력
1997.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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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적 단죄도 마무리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금/죽은자·피해자에 대한 외형적 봉합은 끝났지만 진정한 상처치유는 아직…5·18유족 기충호(66)씨. 5·18희생자들의 유골을 새로 단장한 신묘역으로 이장하는 작업이 한창인 9일, 그는 낮부터 소주를 한 잔 걸쳤다.

『벌써 손자가 고등학교 3학년이오.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놈이지. 늙은 나야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남은 형제와 자식은 그날의 상처가 어찌 쉽게 치유되겠소』

기씨의 장남 남용씨. 사망 당시 그는 25세였다.

『망월동 묘역도 이제 그럴싸하게 조성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했으니 죽은 자식 볼 면목도 좀 생겼어.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진 거지』

17년이 흐른 지금, 그는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장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럿 남아있어. 이곳에 올 수 없다면 옥중에서라도 잘못을 빌어야지. 아직 그런 모습이 없어. 유가족 중에는 정신착란자도 많고 병명도 모르고 신음하는 사람들도 남아 있어. 의사에게 물어도 뭔지 모르겠다는 거야. 유족들 중에는 아사 직전까지 갔다가 배상이 된 후에 생활이 좀 나아진 사람도 있지만 어디 가족이 살아있는 것만 하겠나. 살아있는 자식들이 눈물 흘리는 것은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어. 부모의 원수는 3대나 간다는데. 사실 아직도 겁이 나서 마음대로 말을 못해. 17년 동안 공포에 떨었지. 총리나 장관, 힘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 망월동에 오면 우리는 이리저리 끌려 다녔어. 경찰이라는 사람들이 경주로 제주도로 3, 4일씩 데려다 놓고는 행사가 끝나면 다시 광주로 데려왔어. 그 사람들이 진짜 경찰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회개를 해야 사면도 생각해 볼 문제지. 헌데 옥중에서 큰소리 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어. 전·노가 국민 앞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면 우리도 사람인데 마음이 좀 풀리지 않겠나』

눈가에 번지는 눈물을 훔치며 지친 듯 뿜어 내는 쉰 목소리, 휘어진 걸음걸이, 일그러진 표정. 그의 독백에는 절망과 분노에서 체념으로 이어진 5·18의 아픈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에게는 5·18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로 보였다.

「역사는 사실인가, 해석인가」라는 관점에서 5·18은 아직 해석의 편에 서있다. 5·18은 처음 폭도, 불순분자, 간첩 등의 「단어」에서 시작, 「과격시위」 「과격진압」이라는 양비론으로 흐르다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기까지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광주 시민들에게 올해의 5·18은 여느 때보다 남다르게 다가온다. 전두환과 노태우씨 등 진압 수뇌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완성됐고,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부담」이었던 5·18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는 계기가 됐고, 폭도와 진압군에 대한 법률·사회적 해석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는 것은 비로소 정부가 5·18을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문제가 광주라는 지역적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객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풀이 위주의 5·18행사는 이제 축제의 형식으로 대전환을 맞게 된 것이다.

5·18관련 단체들도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투쟁 위주에서 다채로운 기념 사업을 통해 5·18의 역사적 의미를 전파하고 5·18정신을 계승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 가고 있다. 5·18기념재단의 이강 상임이사는 『자유롭게 5월을 말하고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며 『이제 투쟁보다는 변화한 현실에 어울리도록 다양한 기념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수만 유족회장은 『아직 5·18에 대한 완전한 진실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상당한 부분이 밝혀지긴 했지만 몇가지 핵심사항은 미제로 남아 있다. 발포명령체계, 실행단계의 책임자, 진압작전 실상,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의 역할 등이 그렇다. 이 상태에서 기념일 지정이라는 「형식」의 완성으로 오히려 5·18의 「실체」는 역사에 묻힐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진실규명이 전제될 때 화해와 용서도 가능하다는 게 5·18관련자들의 생각이다.

정 유족회장은 또 5·18과 관련, 실형선고를 받은 8명 뿐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지휘부 35명에 대한 상훈박탈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사병들에 대해서는 5·18의 또다른 희생자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족들이 요구하는 5·18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과 5·18묘역의 국립묘지 승격 등의 문제도 남아있으나 이는 정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별다른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같은 외형적 봉합보다도 내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다. 유족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5·18을 광주만의 문제로 좁혀서 보려는 시각에 대해 섭섭함을 표시한다. 5·18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타지역 사람들이 『또 그 얘기냐』라고 외면할 때 광주는 슬픔에 빠진다.

5·18이 한국 민주주의 제단에 흘린 피는 값진 것이었다. 때문에 5·18은 광주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많은 국민들이,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진정으로 광주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기를 갈망하고 노력할 때 5·18은 한차원 높게 승화할 것이라고 광주 시민들은 말한다.<조재우 기자>

◎새단장 ‘망월동 묘역’ 어제와 오늘/‘폭도들 묘지’서 ‘민주의 성역’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숨쉬는 광주 망월동 5·18묘역. 5·18의 국가기념일 지정과 신묘역 조성으로 묘역 입구까지 4차선 도로가 뚫리고 40m높이의 위령탑이 세워져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구묘역엔 아직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한이 서려 있고 80년대 민주화 역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망월동 묘역은 80년 5월27일 광주진압 직후 신군부의 「학살 흔적 지우기」 조치의 일환으로 생겨났다. 신군부는 이날부터 열흘간 126구의 시신을 광주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낯선 공원묘지로 옮겨와 900평 남짓한 야트막한 야산에 집단 매장했다. 광주민중항쟁유족회 정수만(50) 회장은 『시내 곳곳에서 가슴이나 머리에 총상을 입은 시신들이 청소차와 리어커 등에 짐짝처럼 실려왔다』며 『부패가 심해 신원을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비닐로 둘둘 말아 그대로 매장한 시신도 있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설명했다.

신군부에 의해 급조된 망월동 묘역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81년 5월18일 첫 추모제가 열렸지만 제물준비는 물론이고 분향도 못할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경찰이 묘역 입구를 완전통제해 유족과 학생들은 산을 넘어 들어가야만 했다. 추도사를 낭독하던 유족회장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망월동 묘역은 정권의 공작으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5공 정권은 『다른 지역으로 이장할 경우 위로금 1,000만원과 이장비 50만원을 주겠다』고 유족들을 부추겨 83년 이후 26기가 망월동에서 빠져 나갔다. 5·18만 다가오면 유족들과 관련단체 인사들은 강제로 전남 외곽지역으로 분산돼 참배 등 기념행사 개최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평소에도 유족 외에는 학생과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돼 묘역 입구에서 최루탄 공방이 벌어지는 날이 많았다. 학생과 경찰간에 산을 타넘는 숨바꼭질이 빚어지고 참배온 학생들이 경찰에 대거 연행되기도 했다. 유족 이청자(52)씨는 『동생의 묘를 찾을 때마다 묘역 곳곳에 깔린 사복 경찰의 감시를 받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미행당하곤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84년 이후 이같은 분위기는 바뀌었다. 유족과 재야인사, 학생 등이 참가한 대규모 위령제가 열리면서 망월동은 「금기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한열, 조성만, 강경대, 노수석 등 민주화 시위 도중 사망한 대학생들의 시신 32구도 이곳에 묻혔다.

이때문에 6공 들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방문을 시도하다 유족과 학생들의 결사반대로 무산됐다. 한 여당의원은 묘역을 비공식 방문했다 유족들에게 잡혀 국회의원 배지를 뺏기는 등 곤욕을 치렀다. 문민정부 이후에는 신한국당 강삼재 전 사무총장의 방문을 필두로 김종필 자민련총재, 황낙주 전 국회의장, 박찬종 신한국당고문 등 유력인사들의 공식·비공식 방문이 잇따랐다. 묘역에 대한 감시·통제의 해제로 일반인의 방문이 크게 늘면서 망월동은 「폭도들의 묘지」에서 「민주성역」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5·18묘역안내소 홍순백 소장은 『전남지방은 물론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유치원생, 신혼부부, 단체관광객들이 몰려 들어 현재는 연간 50만명이 찾고 있다』며 『신묘역 조성으로 묘역이 화려해지고 대중화하더라도 망월동에 서린 「5월의 저항정신」은 퇴색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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