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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을 보며(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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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을 보며(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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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거리에 연등의 등불들이 걸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캄캄한 무명을 느낀다. 실로 오늘의 우리 사회는 무명천지다. 진여에 대한 무지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것, 올바른 것에 대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오욕의 갈애에서 생기는 번뇌로 세상이 어지럽혀져 있다. 정견없는 사견, 정도없는 사도로 미망에 빠진 이 무명장야를 밝히기에는 연등의 등불들이 너무 흐려 보인다.불교만이 아니다. 종교가 우리 사회를 구제하는데 얼마만한 힘이 되어 있는가.

종교란 내세의 구원 뿐 아니라 현세의 구제를 위해 있다. 어느 종교든 현세를 올바르게 살지 않고는 내세에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설교한다. 그래서 종교마다 가르치는 것이 수행이요 선행이다. 기독교에서는 십계명이며 산상수훈이 있고 불교에서는 팔정도며 십선계가 있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는 이들 종교의 근본사상이자 행동지침이다. 이 계율들을 지키고 실천하면 내세가 천당이요 극락일 뿐 아니라 현세가 곧 천당이나 극락처럼 평화롭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1995년의 인구 센서스 결과, 우리나라의 종교 인구는 2,260만명으로 총인구의 50.7%에 이른다. 어린이까지 포함한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무슨 종교인가의 신자인 셈이다. 법당이나 예배당 등의 수는 전국에 5만개가 넘어 우리나라 각급 학교수의 3배에 가깝다. 밤에 기차라도 타고 큰 도시를 지날 때 그 임립한 빨간 십자가들은 얼마나 우리 종교인구의 위세를 과시해 주는가.

이렇게 많은 각종 종교의 신자들이 교리에 따라 수행과 선행을 실천하는 진실한 교도라면 우리나라에 오늘날과 같은 혼돈은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무엇 때문의 신자들인가.

한보사건으로 야기된 오늘의 파국은 따지고 보면 나라 전체의 부도덕성이 그 시원이다. 현 정권은 이른바 한국병을 치유하겠다는 깃발을 들고 나섰다가 그 깃대에 쓰러지는 꼴이 되었다. 진흙탕 속에 들어가 자기 발을 씻으려는 헛된 노력의 결과가 한보사태로 나왔다. 사회 구석구석의 한국병이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면 그 책임이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신자들에게는 없는 것인가.

물론 우리 사회의 병리들은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데도 큰 책임이 있다는 자성의 소리가 종교계에서 있어 온지는 오래다. 종교가 윤리의 실천대신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의 욕구를 기원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건강상 내분비선에 이상이 있는 것일까. 생리학적으로 종교의 여러 덕행들은 내분비선에 결함이 있을 때 실행하기가 한층 어려워진다고 한다.

지금부터라도 종교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위한 기구가 아무리 간절한들 사회의 지복없이는 개인의 복리가 없고 사회의 평화 없이는 개인의 안녕이 없다. 그리고 행여 자기 죄는 사죄의 기도 하나로 언제든지 용서된다는 생각의 면죄용 신심은 아니었던가. 각 종교의 교단들이 호화성전의 경쟁속에 상업주의화하여 서로의 반목으로 신자들의 인도에 등한한 동안에도 신자들은 각자 하나씩의 교당을 가슴속에 가지고 스스로 교의를 실행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니라」고 했다. 종교가 언제까지나 「빈사의 간호사」일 수 없다.

왜 신도들만이냐고 할는지 모른다.

중세때의 면죄부는 남의 부인이나 딸을 교회로 가는 도중에 능욕했을 때보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능욕했을 때가 더 중죄로 값이 비쌌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었을 때 교당에 안 다니는 사람보다는 다니는 사람의 죄가 더 클 수 있다.

우리나라 종교인구의 급증은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정신적 공황 때문이라지만, 또 요즘처럼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수록 더욱 종교에 기대고 싶겠지만, 그럴수록 국민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신자들이 기여할 바는 크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원죄에 의한 인간의 타락, 불교에 있어서의 무명에 의한 중생의 미망이 종교의 시발점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바로 이 원죄, 이 무명의 극한상황에 놓여 있고 그래서 신자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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