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도 훨씬 더 되는 아득한 「옛날」, 무리하게 집권한 신군부세력의 칼날이 서슬 퍼렇던 그 어느날, 당대의 명문가로 그 명성이 오늘도 자자한 한국일보의 장명수 선생으로부터 좀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연락이 있었다.그때 만난 장소가 시내 어느 호텔의 커피숍이었는데 장선생은 나에게 「한국일보」에 칼럼을 하나 연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선 놀랐다. 군부에 의한 언론 단속이 아직도 철저하던 그 시절에 내 칼럼이 서울 장안의 유명 일간지에 실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심하게 비판만 하지 마시고 적당하게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장선생의 당부이었을뿐 다른 부탁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내 글이 목요일마다 한국일보에 매주 실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칼럼 명칭을 「동창이 밝았느냐」로 하려 했지만 그 표현자체가 집권층에 대해 지나치게 도전적으로 들릴 것 같다하여 조심스럽게 「동창을 열고」로 바꾸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나의 때는 이미 끝났다」라는 칼럼이 나간 것은 1985년의 이른 봄이었다.
그 칼럼 한편이 우리사회에 그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하였다. 다소 문제가 되리라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토록 엄청난 노도를 몰고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하버드의 총장이던 퓨지 박사는 학생들의 난동을 경찰력을 동원하여 깨끗하게 정리하고 난후 임기가 다 되기도 전에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하면서 「나의 때는 이미 끝났다」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 하버드를 표연히 떠났다는데, 이 나라의 3김씨는 왜 여전히 정계에 버티고 있어 조국의 정치현실을 어렵게만 만들고 있는가. 바통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정계를 은퇴하여 조용한 곳에서 낚시나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글 한편을 한국일보에 발표하고 나서 말 못할 곤경에 빠졌다.
전두환씨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아먹고 그런 글을 썼는가 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 액수까지 정해서 10억원이다, 20억원이다 하는 엉뚱한 자들도 있었다.
한국일보에서 소정의 원고료를 받은 것 밖에 없었는데. 어떤 자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아예 지구촌을 떠나달라고 부당한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는 세상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편지 100통을 받으면 그중 95통은 나를 격려하는 내용으로,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나와 생각이 똑 같다고 하였고 다만 다섯통 정도가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민중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것은 그 95통의 격려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른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이 나의 큰 불찰이었다.
한국일보가 그렇게도 절실하게 나를 붙잡을 줄 알았더라면 다른 신문사의 간청을, 아무리 우정때문이었고 의리때문이었다고 하여도 결코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장재구 사장은 떠나지 말아 달라고 손을 잡았고, 장명수 선생은 내가 강연하러 가 있던 캐나다까지 찾아와 만류하였다.
그때에는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하도 부끄러워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뒤로 나는 글을 써서 사회에 공헌한 바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강재 회장이 세상을 떠나 그 빈소에서 장재구 사장을 만났을 때 그가 간곡하게 나에게 부탁하였다. 『정치 그만 두시면 우리 신문에 글을 써주셔야 합니다』
그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매우 송구스러운 심정이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옛글도 있거니와 글을 쓰기로 한 내 결심은 매우 단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언론의 자유가 애매모호한 이 한국에서 과연 무슨 바른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먼길을 찾아와 다시 「동창을 열고」를 시작해야겠다는 장재구 회장의 뜻을 전해준 장명수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며 나도 힘차게 동창을 연다. 그러나 너무 활짝 열어서는 안되는 줄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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