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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악몽들(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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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악몽들(장명수 칼럼)

입력
1997.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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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가까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한보 청문회의 와중에서 한 증인의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한보철강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 상무였던 박석태(59)씨는 거짓말이 춤을 추는 청문회에서 「청와대 개입설」 등을 처음 인정한 비교적 솔직한 증인이었는데, 자신의 솔직했던 증언에 대한 죄책감과 우울증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의 증언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하고 있다.그의 시신앞에서 『정부가 죽였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정부」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지난 시대에 많이 듣던 증오에 찬 절규다. 시위하다가 최루탄을 맞고 죽은 학생, 고문을 못이겨 죽은 학생, 건물에서 투신자살하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학생들의 죽음앞에서 그런 절규가 터져 나오곤 했다. 박석태씨는 그런 투사들과는 거리가 먼 금융인이고, 이번 사태에서 책임을 나눠질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나, 한 시대 한 사태의 희생자란 점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의 희생자, 그 억울한 죽음은 누가 만드나. 한 체제를 구성하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다른 체제나 개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기도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부분의 책임은 매우 단순하게 정권 책임자들에게 있었다. 박석태씨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보사태에서 그는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주연이나 조연들이 헌신짝처럼 벗어던진 명예니 자존심이니 책임감이니 하는 것들을 벗어버리지 못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번 사태의 최대 희생자가 됐다. 광포한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그가 너무 나약했으므로 결국 자기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 책임은 한보를 이용하여 개인 이득을 챙기려던 사람들에게 있고, 최종 책임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있다.

김대통령은 92년 대선에서 한보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 그의 아들이 한보 특혜의 배후일 것이라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그 의혹들은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한보가 그의 집권기간에 5조원이라는 상식을 초월하는 특혜대출로 모래성을 쌓다가 주저앉아 국가경제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책임이 무거운데, 그의 아들로 인한 국정문란이 민심을 자극하여 국가를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뜨렸으니 그가 남은 임기안에 풀어야 할 숙제는 너무나 무겁다.

대다수의 국민과 정치권의 생각은 한보사태와 김현철씨에 대한 수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대통령의 하야만은 막아야 한다는데 일치하고 있다. 『아들이 감옥에 갈 일을 저질렀는데 개혁을 외쳐 온 아버지가 어떻게 대통령 자리에 있겠느냐』는 우려도 이제는 『아들이 불법행위를 했다면 당연히 감옥에 보내야지 감옥에 안보내고 어떻게 대통령 자리를 지키겠느냐』는 말로 바뀌고 있다. 하야에 반대하는 전제조건은 철저한 수사와 법에 의한 처벌이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위기의식이 점차 느슨해지고 있다면 위험한 일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청문회에 대한 혐오감과 「비교적 정직했던」 한 증인의 자살사건으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날 아침 자동차에서 한보 청문회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삼풍백화점 자리를 지나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한남대교를 건넌 적이 있다. 일부러 코스를 그렇게 잡은 것이 아니고, 차가 덜 밀리는 길을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청문회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든데, 그 비극의 현장들이 겹치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청문회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와 같은 날림공사이고, 우리시대의 악몽이었음이 한 순간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김대통령이 할 일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거듭 촉구하여 청문회에 대한 국민의 환멸을 보상해 주는 것이다. 검찰이 제 기능을 했던들 저런 엉터리 청문회가 왜 필요했겠느냐고 새삼 분통을 터뜨리는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가 이제 국민에게 무슨 희망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악몽들을 자신의 임기와 함께 묶어 한강에 수장하겠다는 각오, 위급할수록 바른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한발 한발 새 길이 열릴 것이다.<편집위원·도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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