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식·비판문화가 떠나간 자리를 무관심·개인주의·향락문화가 메우고 있다/과모임·학생회는 구성조차 힘들고 고시·취직준비에 누가 같은과인지도 모르며 그 한켠엔 헌팅족·귀족동아리가 판을 친다대학생이 데모만 하고 공부는 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무성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때 대학은 살아 있었다.
바깥사회에서는 대할 수 없는 독특한 낭만과 자유의 물결이 캠퍼스에 가득했다. 그 속에서 젊은 가슴들은 청춘의 환희와 고뇌에 젖었다. 옷은 허름했지만 지성과 열정이 빛났고 돈이 없어도 우정은 굳었다.
그러나 지금 봄꽃과 신록이 흐드러진 캠퍼스에 대학생은 없다. 등록금을 내는 대중만이 가득할 뿐. 사회의 청량제였던 대학이 이제는 대중문화의 첨병으로 향락과 소비문화를 이끌고 있다.
70, 80년대 대학에 풍미했던 비판문화와 계몽주의, 공동체 의식이 퇴조하고 지금은 그 자리를 사회와 주변에 대한 무관심, 개인주의, 향락문화가 메우고 있다.
『캠퍼스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우리」라고 할 만한 공통의 문화가 사라져 버렸거든요』 서울대 음대 3학년 김현정(21·여)씨의 눈에 비친 대학은 모래알의 집합이다. 『정식모임은 커녕 함께 얘기를 나누기조차 쉽지 않아요. 어떤 과는 1년에 한차례도 정식 모임을 갖지 않고 과대표조차 못 뽑고 있어요. 모임과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 과공동체가 사실상 유명무실해 졌어요』
그는 지난해 말 단과대 및 과학생회 선거 당시 크게 실망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선거 홍보를 했지만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투표율이 너무 낮아 학생회 구성 자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선거 유인물을 나눠 주는 선배를 후배들이 잡상인 취급하는 데는 분노마저 느꼈다. 얼굴을 찌푸리며 『귀찮게 이런 걸 왜 주느냐』며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유인물을 받자 마자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지난해 1학기 여름방학 농촌 활동을 홍보하러 다녔는데 후배들 대부분이 그런 걸 뭐하러 하느냐는 태도였어요』 결국 10명도 모이지 않았고 그나마 3, 4학년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나 선후배 관계도 크게 변했다. 진지한 대화로 서로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사라지고 남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요즘 대학 분위기다. 강의를 같이 들어도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학생회 활동 등 단체활동에 대한 무관심은 말할 것도 없다. 연세대 사회학과 양정석(25)씨는 『4월중순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식전행사인 록그룹 공연이 끝나자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100명도 남지 않았다』며 『소속감과 참여의식 실종으로 대학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학부제를 실시하는 학교일수록 더 심하다.
한때 대학여론을 주도했던 학회도 파리를 날리고 있다. 『1학년 때만 해도 학회에 참여해 공부해 보려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학회에 관심을 가진 후배는 거의 없어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이재성(26)씨는 학생들끼리 의견 교환을 위해 설치된 「화장실 낙서판」의 글을 보면 학생들이 얼마나 역사·사회 의식이 결여돼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 대부분이 사회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요. 그러니 당연히 생각의 폭과 깊이가 떨어지게 되지요. 북한동포돕기운동만 해도 그래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논리적 근거없이 「그런 사람들을 왜 돕느냐」 「북한동포에게 무슨 일 났느냐」고 낙서하듯 써놓은 글이 많아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대중 향락문화의 침투도 심각하다. 아니 대학이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단인지도 모른다. 각종 아르바이트로 사회인 못지 않게 벌어 들이는 돈이 대학의 첨단대중문화를 지탱한다.
짙은 화장과 패션모델 뺨치는 현란한 옷차림으로 고급차를 몰고 학교에 나타나고 나이트 클럽과 유흥가를 돌아 다니며 「헌팅」에 열중하는 학생들. 고려대 신방과 이승리(20·여)씨는 『같은 대학생이지만 위화감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며 『「남들보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노느냐」가 목적인 소위 「부자 동아리」는 날로 북적댄다』고 말했다.
『대학은 이제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즐기는 놀이터가 돼 버렸어요. 얼마전 학교앞 소주집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는데 후배 한명이 「이렇게 지저분하고 허름한 데서 어떻게 술을 마시느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어요』
연세대 경제학과 대학원 김두환(28)씨는 대학이 인격과 지성 연마의 공간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돼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후배들 절반이상이 학교 어학당이나 영어학원에 다녀요. 강의실에서는 서로 못봐도 영어학원에 가면 모두 만날수 있다고 말할 정도지요』
이런 대학문화의 죽음이 학생 스스로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지만 지나친 경쟁을 조장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 대학과 사회의 책임이 크다고 학생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대 김현정씨. 『얼마전 신입생 1명이 상담을 청해 기쁜 마음으로 응했는데 대뜸 내뱉는 첫마디가 「교직에 나가려면 과에서 몇등 안에 들어야 하는가」였어요. 1학년 성적에 따라 교직에 나갈 자격이 주어지는 관행 탓이지요』
1학년 초부터 대학원 진학과 취업을 걱정하고 영어공부와 학점 등 경쟁의 분위기에 휩쓸려야 하는 후배들의 모습에 그는 「대학문화의 실종」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오래지 않아 대학문화라는 말조차 사라지고 말 겁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세상은 변했다?/“개인주의라구요? 다원주의가 아닐까요?”/귀고리 남학생·군화차림 여학생·스킨헤드족·호출기·휴대폰·노트북컴퓨터·인터넷·유럽배낭여행…
『개인주의요? 전 다원주의라고 봅니다. 대학이 지성과 학문의 전당이라면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의 대학생들은 사회 개혁과 이데올로기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80년대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적 사명을 지닌다고 생각해요. 다양성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거죠』
중간고사가 한창이던 지난 25일 A대학 공학부 건물 앞 잔디밭에서 만난 심모(21)씨는 『세상이 변했다』는 말로 「사회 정의와 공동체 문화」라는 패러다임에 따른 비판을 일축했다. 적갈색으로 군데 군데 물들인 머리를 쓸어 올리고 왼쪽 귀에 대롱거리는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세상은 변했다. 변화의 물결은 상아탑에 가장 빨리 몰아쳤다. 긴 머리를 애교있게 묶은 남학생, 군복바지와 군화차림으로 등교하는 여학생. 초록색 보라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컬러족, 머리를 박박 깎은 스킨헤드족. 다른 학생들은 그들을 굳이 이상한 눈으로 보지도 않는다. 개성과 취향의 문제인 겉모습에 사회 인식과 도덕 관념을 끌어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
호출기와 휴대폰으로 무장한 「정보화」시대의 신입생들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 간다. 교수들은 학기초에 『수업 중에 신호음이 나지 않도록 휴대폰이나 호출기를 끌 것』을 당부하고 『과제물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 디스켓으로 제출하라』고 주문한다. 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미국의 대학에서 자료를 구하고 PC통신으로 대화를 나눈다.
기성세대에게 이들의 「세계화」지수는 놀라울 정도. 무전여행 대신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 오고 해외 유학을 꿈꾸지 않으면서도 어학연수 계획을 세운다. 입학과 동시에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하고 토익(TOEIC) 공부를 시작한다.
외국 학교와의 교류가 늘어 나면서 노랑머리, 검은 피부의 동급생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해 하지 않는다. 외국 학생에게 김치찌개나 순대를 소개하고 레스토랑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서양식 식사도 사양하지 않는다.
진리를 모색하고 고민을 털어 놓던 사상의 해방구, 학회나 이념 동아리에는 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대신 영어회화 창업 동아리나 트레킹 스키 스킨스쿠버 재즈댄스 동아리들이 신세대의 실용주의와 감각주의를 대변하고 나섰다. 사회의 양지로 나서지 못하던 동성애자 모임이나 얼터너티브 록그룹도 캠퍼스에서 뿌리를 내렸다.
『아버지 승용차를 몰고 등교하기가 죄스러워 학교 1㎞밖에 주차했다』는 대학원생과 『짧은 치마를 입고 학교 가기가 쑥스러웠다』는 만년 바지차림 여대생은 자취를 감췄다.
캠퍼스에는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다』는 멋쟁이 여대생과 『소비는 죄악이 아니다』는 오너 드라이버 대학생이 암울한 사회 현실 대신 21세기의 즐거운 삶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다.<김경화 기자>김경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