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집 등 265권 발간/올해 100권가량 더 낼 계획/읽기 쉬운 보급판 ‘나랏말쌈’도 꾸준히 시리즈 출간『서로에 바람 기운 쌀쌀하여(서로요풍기)/봄 지나도 눈이 녹지 않았는데(경춘설미잔)/바다 구름은 온통 안개가 되었고(해운혼작무)/언덕물은 여울을 이루지 못했네(수불성탄)/세상 일은 두려운 눈물에 의지하고(세사빙위체)/세월은 말 가는대로 맡겨두건만(연화임거안)/남으로 가면서 병란 소식 듣노니(남정문봉화)/어떻게 평안을 보전할 수 있으랴(나득보평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 시대 문신 신흠(1566∼1628년)의 우국충정어린 5언시 「관서의 노상에서 짓다(관서로상유작)」 전문(상촌집 1권 419쪽)이다.
어려운 한 시대를 꿋꿋이 살다간 그의 삶과 문장을 이제야 한글로 접할 기회를 얻게 됐다. 솔출판사에서 민족문화추진회가 번역한 그의 문집 상촌집을 7권(각권 1만5000∼1만7000원)으로 펴낸 것. 이와 함께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조선 철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권상하(1641∼1721)의 한수재집도 6권(각권 1만5000∼1만7000원)으로 나왔다.
이 출판사가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을 「고전국역총서」 시리즈로 내기 시작한 것은 94년. 그동안 「완당전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다산시문집」 「연려실기술」 「동문선」 등 50종 265권이 나왔고 올해안에 100권 가량을 더 낼 예정이다. 얼핏 「무겁고 어렵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들 총서를 낸 사람은 젊은 문학평론가 임우기(42·솔 대표)씨. 그는 대학원까지 독문학을 전공했고 잡지 「문학과 지성」 편집위원을 오래 맡을 만큼 최신 서양 문예이론에 밝다.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게오르크 루카치, 발터 벤야민 같은 이론가를 다룬 「입장총서」나 버지니아 울프 전집, 카프카 전집을 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 만큼 고전국역총서를 내기로 한 결심은 어찌보면 의외다. 『고전속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것에는 정말 대단한 게 많습니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이황의 이기론에는 분석철학자의 그것보다 더 정치한 언어분석이 들어있고 실학자들의 시에는 이미지즘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죽습니다. 포스트 뭐니 뭐니 해서 「유행사조」에만 치중하다 보면 제대로 된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어렵지요. 그런 유행사조도 사실은 다 서양 고전들을 토대로 생성된 것 아닙니까. 서울대 국문과 조동일 교수가 조선말의 철학자 최한기의 논문을 읽고 나서 그 난해하다는 헤겔 철학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 적이 있는데 맞는 얘기입니다. 이 산 봉우리에 오르면 저 산 봉우리가 보이는 법이지요』
한문 원문까지 실린 고전국역총서가 주로 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나랏말쌈」 시리즈는 학생과 대중을 위한 보급판이다. 문고본 크기에 예쁜 장정으로 「다산문선」 「열하일기」 「삼국유사」 등 10여권이 나와있고 「삼국사기」 「퇴계문선」 「이이문선」이 곧 나올 예정이다.<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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