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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동천’/윤명로 서울대 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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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동천’/윤명로 서울대 미대 학장

입력
1997.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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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믄밤 맑은 꿈 담긴 그의 시 읽을때면/새 한마리 그리고 훌쩍 세상뜬 나의 스승 장욱진 삶 떠올라어느날 한 화가가 그림 한점 그리려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화폭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화가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즐거운 기분이었다. 담배진이 겹겹이 쌓여 후벼파도 빠지지 않는 손때 묻은 파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행복했을 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벌써 담배와 술을 멀리 한지도 오래였건만 유난히도 을씨년스러운 겨울 하늘이 화가의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내팽개치듯 새 한마리를 그리고 화가는 훌쩍 세상을 떠났다. 나의 스승 화가 장욱진의 이야기다.

나는 미당의 「동천」을 읽으며 문득 화가를 연상했다. 화가는 하고 많은 날들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귀밑까지 치켜올린 어깨에 여덟팔자 걸음을 걸으면서 흐트러진 매무새를 아랑곳 없이 이 주막 저 주막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술로 빈 속을 채운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화가는 긴 휴식이 끝나면 그렇게도 즐기던 술 한모금 마시지 않고 화폭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하늘을 그린다.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화폭에 옮겨심은 것들은 고작 달과 산과 가족, 그리고 나무, 개, 닭, 새들이다. 화가는 도시에 살면서 도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들을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그래서 덕소로 수안보로 신갈로 작업실을 옮겨 다녔다. 그리고 그리운 님의 고운 눈썹같은 새들을 보고 줄지어 날으라 했다. 그래서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화가가 그린 새를 시늉하며 비끼어 갔다.

나는 사춘기에 미당의 「국화꽃 옆에서」를 읽으며 겁없이 시인이 되겠다고 맑디 맑은 밤들을 지새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없이 끄적거렸던 원고지들을 스케치북에 묻어버리고 화가가 되었다. 미당은 나의 꿈많던 청년기를 참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최초의 시인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내가 미당을 처음 만난 것은 약 20년전의 일이다. 미당의 회갑기념으로 마련되었던 시화전에서 그를 먼 발치로 보았던 것 말고는 한번도 그를 다시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시인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때에 미당이 손수 붓으로 쓴 시에다가 목판으로 그림을 새겨주었다. 미당은 훗날 이 작품을 생면부지의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아내박을 뜰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작은 놓였지만 내 주먹은 어디에다 놓았으면 좋을고> 시중유화 화중유시라 했던가. 시인의 작품은 지금도 내 서재에 호젓이 걸려 있다.(1면 시의 본문중 「즈문」은 고어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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