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하면 우리는 미국 스웨덴 등 서양을 떠올리게 된다. 혈통을 중시하는 동양에선 피가 섞이지 않은, 그것도 인종이 다른 외국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아주 인색하다. 서양에서도 휴머니즘의 한 상징이라고 할 이같은 입양이 성행하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중세 유럽은 기독교사상이 힘을 발휘했음에도 어린이들의 수난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낳은 자식을 버리거나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식을 죽이는 데는 저항감을 느꼈던 부모들도 버리는데는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버리는 장소도 사회적으로 마련돼 있었다.
당시 수도원과 교회의 입구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쟁반이 놓여 있었다. 아이를 쟁반에 올려놓고 줄을 당기면 방울소리가 울려 교회나 수도원측은 기아가 들어온 줄 알았다. 이 순간 쟁반은 빙그르 돌아 교회 안으로 들어가 어린이가 굴러 떨어지도록 돼 있었다.
이처럼 태어나자 마자 부모의 버림을 받은 영아들이 교회나 수도원의 품에 안긴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나 수도원은 보통 굴러 떨어진 영아들을 시골로 보냈다. 시골사람들중 양육비 등을 노리고 영아를 인수했다가 죽이거나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버려진 아이 3명중 2명은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악습이 사라지고 어린이들이 대우받는 사회가 된 것은 18세기말부터다. 오늘날 서양사람들이 입양이란 휴머니즘에 남보다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반성이 한 역할을 하고 있다.
16일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선 미국입양아협회 주최로 입양아를 위한 모금행사가 열렸다.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도 참석한 모임행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하필 한국대사관이냐」는 느낌과 함께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40년간 약 9만명의 어린이를 미국에 보낸 우리라 할 말이 없지만 찜찜함은 어쩔 수 없었다. 중세 어린이와 달리 좋은 양부모 만나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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