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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기회/박승평 수석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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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기회/박승평 수석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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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전 미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중 하나는 그가 어린시절 데스밸리(Death Valley·죽음의 골짜기)를 구경했을 때의 감회를 기술한 부분이다.닉슨의 고향 캘리포니아주 내륙에 자리잡은 이 거대한 단층지구는 골짜기의 최저 깊이가 해면 밑 85m에 이를 정도로 미국 최심부를 이루는 장관이다.

그 곳에서 소년 닉슨은 데스밸리의 참모습과 장관이란 골짜기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볼 때가 아니라 힘겹게 바닥 끝까지 내려간 뒤 위로 바라볼 때라야만 비로소 가슴에 와 닿음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탄핵당해 대통령 재임중 치욕적으로 물러났던 닉슨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최악의 몰락과 극복과정을 어린시절의 데스밸리 체험과 대비시킴으로써 이제는 한층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국민들 앞에 내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에게 오늘의 한보사태란 것도 그런 「죽음의 골짜기」와 다름없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통치능력을 치명타당한 정권, 날마다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며 마냥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정치권, 그리고 여전한 외압과 자성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몸부림치고 있는 검찰이 오늘날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최심부라 할 것이다.

필자는 최근 두 차례에 걸쳐 본란에서 검찰의 거듭남을 간곡히 촉구한바 있었다. 「검찰의 풍향계」(95.12.24)에서는 전직 두 대통령마저 구속·기소하기에 이르렀으면 이제 검찰도 더 이상 권력의 바람개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검찰의 비극」(97.2.28)을 통해서는 「해고」 대상이 된 「문민검찰」의 안타까운 추락상과 검찰권독립이 제도에 앞선 검찰 스스로의 의지문제임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후 검찰의 자성 움직임이 장관경질을 계기로 잠시 일어나는가 기대했더니 오히려 검찰에 날벼락만 떨어졌다. 검찰사상 처음으로 진행중인 사건수사 책임자가 바뀌는 사실상의 「탄핵」사태 앞에서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어진 검찰의 처지란 참담하기만 했다.

그런 검찰이 드디어 「앞만 보고 가겠다」고 과감히 선언하고 나섰을 때 우리 국민들이 진정으로 반기며 기대했던 것은 바로 닉슨의 체험처럼 최악의 몰락을 거친 끝에 심연에서 과감히 솟구쳐 올라 거듭나는 우리 검찰의 모습이었다.

그런 국민적 기대가 오늘날 제대로 충족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유감스럽지만 여전히 안개 속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한보재수사가 진행중인데다 국회청문회와도 일정이 겹쳐있어 수사 방향이나 성과를 섣불리 예단키는 어렵다. 하지만 돌출되고 있는 수사상황이나 정치적 기상도는 결코 낙관을 불허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검찰수사의 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는 국민들의 비판이 팽배해 있다. 한보수사의 본류란 어디까지나 5조원이 넘는 불법·부당대출외압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인데, 현철커넥션의 핵으로 알려진 박태중씨조차 소환하기는 커녕 수사 두달이 지나도록 단서조차 못찾았는지 안찾았는지 모를 정도라는게 아닌가. 더욱 기막힌 일은 박씨의 소재조차 파악못해 청문회 출두 요구서가 전달조차 되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두번째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라는 게 이번 사건의 곁가지라 할 정치권 떡값수사 뿐이라는 점이다. 정치권 떡값수사라는 게 과거부터 대가성이라는 편리한 잣대로 말미암아 흐지부지되게 마련이었고, 여당 정치권의 공개적 수사축소 압력마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국 본류를 떠난 곁가지수사의 종착역이 어디일지 여전한 안개속인 것이다.

한가지 기대와 위안은 최근들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검찰 스스로의 결연함이다. 앞서 여야 영수회담 뒤 여권측에서 흘린 현철씨 별건 구속반대와 정치적 해결기도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나왔었다. 엊그제는 드디어 일선검사들조차 이번이 검찰에 대한 국민신뢰와 위상회복의 마지막 기회라며 정치인 수사를 법대로 엄정히 할 것을 대검에 건의까지 했다지 않는가.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두번 죽게된다는 검찰의 절박한 위기의식과 자각이야말로 닉슨의 데스밸리 교훈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오욕의 최심부에서 「검찰권 독립」이라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솟구쳐 오를 때 검찰의 새 역사가 비로소 시작될 것임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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