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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청문회를 보며/김승옥 소설가(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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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청문회를 보며/김승옥 소설가(아침을 열며)

입력
1997.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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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통해 한보사건 청문회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실망이 지나쳐 청문회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청문회장에서 신문을 하던 국회의원이 청문회 무용론을 외치며 특위위원 자리를 사퇴해 버리는 경우가 생길 정도이다.그러나 이번 청문회가 과연 그토록 무의미한 실패작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작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청문회이며, 하지 않았던 것 보다는 역시 해보기를 잘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나 역시 이번 청문회를 통하여 정경유착의 그 세세한 전모가 국민 앞에 속 시원히 노출되기를 기대했다가 『기억나지 않는다』 『재판중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로 버티는 증인들의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태도와 자료미비를 도덕적 훈계로 땜질하고 넘어가는 국회의원들의 비과학적 신문방식, 심지어 증인은 제쳐두고 여야간 당파 싸움을 벌이는 추태에 대하여 분통이 터질만큼 실망하긴 했다. 그러나 이번 청문회의 이러한 모습(그 기능과 한계야말로 「한국형 청문회」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우리 현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한보사건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 「애국적인 독재자」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외국에서 빚을 얻어다가 몇 개의 재벌을 급조하여 오늘날 한국경제의 틀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집권자와 은행만 잘 이용하면 회사원도 단번에 재벌이 될 수 있다는 신화 아닌 현실이 자리잡았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밖에 없는 정태수씨도 오랜 세무공무원 경험에서 터득한 현실경제의 틈새를 최대한 이용하였을 뿐이다. 그러기에 정회장의 표정에서는 진정한 참회의 빛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철강회사라는 거창한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키겠다는데 돈을 대주다가 말다니…』하는 원망의 빛만 역력하다. 그동안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명분을 코에 걸고 경제인들이 얼마나 멋대로 금융계와 정치인을 주물럭거렸는지 짐작할 만 하다.

이젠 「애국적인 독재자」의 감시와 선동도 없어졌고 공금유용에 따른 책벌의 두려움도 줄었고 「우리가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사라졌다. 집권자라고 해봤댔자 장기집권의 염려가 없는, 가난해서 돈에 약한 이른바 「민주 정치인」 뿐이다. 더구나 우리 풍토는 미국의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처럼 기독교 윤리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재산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시 그 관리를 맡긴 것이므로 공공의 이익에 맞게 써야 한다. 이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토록 사소한 부정에 대해서도 극성스럽게 까발기며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선하고 완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고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하는 인간은 불완전하고 「범죄하기 쉽다」는 인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상호 비판, 견제, 검증의 제도적 장치를 다양하게 가동해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며 성숙하는 것이다. 국회의 청문회 역시 바로 그러한 윤리를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제도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자본주의, 우리의 민주주의가 서있는 도덕적 기반은 너무나 운명론적이고 낙관적인 것 같다는게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확인한 느낌이다. 우리의 부정부패는 전통적 가치관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본주의,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정치인은 현대의 사제」라는 강력한 사명감으로 스스로 순결을 추구하고 경제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견인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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