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시장에 옷을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티셔츠를 고르는 내게 집주인은 열심히 그 옷을 예찬(?)한 후 『아저씨, 이거 오리지널이에요』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옆가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양, 색깔, 감 좋고 바느질만 꼼꼼하면 좋은 옷이라는 내 관념은 시장 사람들의 오리지널 논리앞에 무색해졌다. 그 날 내가 들었던 가장 많은 말이 「오리지널」 「진짜」 「우리 집에만…」 「유명상표」였던 것 같다.음식점에도 「원조」라는 잣대가 적용된다. 원조 설렁탕, 원조 충무할매김밥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원조가 목하 성업중이다. 하루는 뭔가 다를 것이 틀림없을 원조의 맛을 알아보려고 한 원조음식점을 찾았다. 그 「원조」의 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찾은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질려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점심을 굶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바로 그 음식점에서 두어집 건너에 똑같은 메뉴의 음식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은 「원조」네보다 더 넓고 깨끗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음식 맛이 원조의 맛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옆의 원조집에 손님을 빼앗기는 것은 원조가 아니기 때문에 겪는 설움이었다.
원조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음식이란 맛있고 정갈하게 조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또 엄밀히 말해서 완전히 독창적인 원조가 있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창조는 모방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누구의 것을 흉내내더라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남의 것과 다른 맛을 내면 되는 것 아닌가? 남의 것이라도 내 땅에 들여와 내 땅에 맞게 바꾸어 내 것으로 발전시킬 때 우리는 그 문화의 독창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모든 음식은 「원조」라 불려야 마땅하다.
이러한 「오리지널」 「원조」논쟁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물론 상품 논문 예술작품 같은 것은 오리지널이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 남의 논문을 인용부호 하나 없이 도용하고, 남의 소설을 수식어 약간 바꾸어 베끼는 행위는 철저한 「원조논쟁」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굳이 원조논쟁이 필요하지 않는 분야에까지 이런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일전에 어떤 분은 필자의 국적을 알고 난 다음, 『페루말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다. 페루말이란 따로 없고,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서반아어를 사용하며 나는 그 말을 가르친다고 하자, 『서반아어요? 그 원조는 스페인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원조의 잣대가 언어에도 적용됨을 깨닫게 해준 질문이었다. 원조는 스페인이지만, 원조와 비원조 서반아어의 차이는 약간의 음성학적인 것일뿐이라는 나의 설명에 그 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원조영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어의 원조는 영국이고 영국영어와 미국영어도 발음면에서 약간 다른데, 영어 강좌다 하면 미국식 영어를 권장하고 고집하는 걸 보면 「원조」의 잣대가 늘 일정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페루인>페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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