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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침방위’ 필요하다/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장(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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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침방위’ 필요하다/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장(특별기고)

입력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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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경제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기획원에 「침수방지대책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 이름만 보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 첫 회의 땐 치안국 소방관계자가 참석하기도 했다.장부총리가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지금 나라의 경제사정이 꼭 물이 새 침몰하는 배와 같으니 모두 힘을 모아 물막는 일부터 서두르자』고 당부했다. 그만큼 경제 사정이 긴박했다. 5·16후 통화개혁 등 혁명정책의 시행착오와 연이어 터지는 스캔들, 또 정치권의 혼란에다 흉년까지 들어 실업은 늘고 물가는 치솟았다. 민심은 흉흉하고 위기감이 팽배했다.

장 부총리는 회의실에 『회이불의 의이부결 결이불행』이라 새긴 커다란 액자를 걸어놓고 회의시작 전 뜻풀이 겸 당부를 했다.

『모여도 중요한 일을 논의하지 않고, 논의해도 결정하지 않고, 결정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니 이 자리에선 무슨 경제문제든 다 까놓고 의논결정해서 실천해 가자. 정부가 뭔가 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들도 믿고 따라올 것』이란 것이었다.

신문사의 창업주 사장으로 있다 입각한 장 부총리는 생각도 기발하고 행동력도 발군이었다. 관료 조직의 구습과 경직성을 타파, 새바람을 일으켰다.

침방위가 불철주야 몇달간 애를 쓰자 착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살아나고 경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것은 62년이지만 실제 고도성장이 시동된 것은 침방위 이후부터다.

지금 강경식 새 경제팀장이 만들어야 할 것이 바로 「현대판 침방위」가 아닌가 싶다.

64년과는 문제가 다르지만 경제라는 배에 물이 새고 있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그때는 쌀값 폭등과 연탄부족, 전력난 등 절대빈곤이 문제였으나 지금은 신용불안과 외환위기, 실업사태 등이 급하다. 그때도 경제불안엔 아랑곳없이 정치권은 몹시 혼란스러워 경제엔 별 도움이 안됐다. 그러면서 경제실정을 소리높이 질타하고 공격했다. 지금도 한국경제라는 배는 연일 물이 새어 가라앉고 있는데 서로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아우성인 형국이다.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극약 처방도 쓸 수 없고 믿고 따라갈 깃발이나 구심력도 없다.

무엇보다 경제안정에 필수적인 신용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정말 물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가장 급한 것이 금융불안이다. 연이은 대형부도로 신용질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신용불안은 금융파이프를 막아 더 큰 부도를 낳는다. 이때는 교과서 같은 훈시보다도 정부 스스로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은행 스스로의 자조 노력도 중요하지만 한 나라의 신용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역시 정부 몫이다.

『은행이 거덜나게 된 것은 은행의 자업자득이니 알아서 하라』는 논리는 매우 옳은 말씀이긴 하나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잘못하면 큰일 낼 소리다.

배에 연신 물이 들어와 배가 가라앉을 판인데 『평소 배 간수를 잘못한 탓이니 진작 잘 했어야지』하며 팔장끼고 훈계하는 것과 같다.

그에 버금가게 급한 것이 외환부문이다. 외환은 정말 여유가 없다. 외환부문과 금융불안은 표리관계인데 은행들의 신용이 불안하니 외환문제도 긴박하게 돌아간다. 한국경제의 기본(Fundamental)은 아직 괜찮은 편인데 운영상의 미숙으로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74년 1차 오일쇼크 땐 국제 금융시장에서 금리 불문하고 돈을 끌어다 쓴 경험이 있다. 또 80년 2차 오일쇼크 땐 선진 우방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빠른 속도로 환율을 현실화 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할 것이다.

또 하나 급한 것이 실업 증가다. 지금 이미 실업이 문제되고 있지만 기업들이 본격적 사업조정에 나서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따라서 고실업이 사회문제로 폭발되지 않게 하면서 당분간 고실업 속에서 살아가는 방도를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젠 체면차릴 때가 아니다. 한보사태 때문에 온 나라가 정신이 없는데 그 사이에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다. 분위기를 빨리 바꿔 물 퍼내는데 모두가 동참토록 해야 할 것이다.

침방위는 우선 물을 빨리 퍼내 배의 복원력을 세운 다음 구조조정, 신산업 육성 등의 항해 방향을 잡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구멍은 커지고 물이 차 침방위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될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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