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후원행사·명절때 인출” 전무 진술/자금난 작년말 91억원은 막판로비용 추정/정씨가 인출 지시… “아산만공사비”로 표기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의 로비자금이 베일을 벗고 있다.
본사가 31일 입수한 검찰수사기록에 따르면 정총회장은 15대총선(4월11일)직전인 지난해 4월1일부터 10일까지 회사자금 횡령 등으로 조성한 비자금 중 33억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정황상 이 돈은 한보가 선거자금으로 정치권에 뿌린 것이 확실시된다. 특히 정총회장은 총선 전날인 4월10일 무려 10억원을 현금으로 인출, 이 돈이 선거막바지에 몰린 정치인들에게 「실탄」으로 지급됐을 것으로 보인다. 정총회장이 직접 작성한 「일일자금수지상환표」에 따르면 4월에는 10일이후 전혀 비자금 인출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이 돈이 대부분 선거용으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정총회장이 권노갑 의원 등 정치인에게 전달한 뇌물액수가 5천만∼1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총선 전날 자금을 받은 정치인은 최소 10명선이며, 33억원 전액이 선거자금 지원명목의 「떡값」으로 사용됐을 경우 돈 받은 정치인은 3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3월14일의 한보사건 1차공판에서 『정총회장이 자금조달을 총괄하면서 일일자금수지 실적 및 계획표를 매일 결재했기 때문에 비자금 사용처를 확인하려면 이 자료를 근거로 현금의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수지표가 사실상 로비자금과 은닉재산 일람표인 셈이다.
한보그룹 주규식(45) 전무 등 재정본부 관계자들은 검찰 1차수사에서 『정총회장이 지시할 때마다 출납부 직원이 한보법인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 마대에 담아 정총회장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대략 2억∼3억원씩이었으며 월 7, 8회이상 인출한 경우가 많았다』고 진술했다. 주씨는 또 『정총회장이 돈을 마련한 시기는 주로 정치인들이 후원하는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와 (로비대상에게) 인사를 해야하는 시기였던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재정본부 직원 박모씨는 『현금인출한 자금은 수지표 지출란에 「아산만공사비」라고 표기했으며 94년 명절무렵 수십억원이 인출된 경우도 있었다』며 『여직원들이 돈이 든 무거운 마대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실소한 적도 있다』고 진술했다.
수지표상의 구체적 내역을 보면 96년 2월 정총회장은 홍인길 의원에게 2억원, 이철수 제일은행장에게 2억원을 주었다. 한보의 2월 자금인출액은 5억원으로 정총회장의 로비자금 사용내역과 대략 일치한다. 7월에는 23억원이 현금인출됐는데 이 중 6억원이 권노갑 의원과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의 로비자금으로 건네졌다. 추석이 낀 9월에도 신·우행장에게 4억원이 전달됐으며 9월3일자 내역에는 4억원이 인출되는 등 모두 24억5천만원이 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한보가 극심한 자금압박에 몰렸던 10∼12월에 인출된 91억원의 행방. 막바지에 몰린 한보가 「막판로비」를 벌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검찰 수사과정에서 정총회장이 12월 초 신광식 행장을 호텔에서 만나 현금이 든 사과박스를 전달하려다 거절당해 로비가 실패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정총회장이 홍인길 의원에게 청탁, 이석채 청와대경제수석을 통해 조흥은행에서 1천억원의 대출이 이루어지자 사례비로 2억원을 지급한 시기가 12월인 것도 눈길을 끈다. 또 황병태 의원이 김시형 산업은행총재에게 대출청탁을 한 대가로 2억원을 받은 시기도 이 때여서 정총회장이 막판로비에 총력을 기울였던 정황을 뒷받침한다.<이태희·현상엽 기자>이태희·현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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