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복음「극단화한 탈환상이 지혜의 최고 형식」이라고 말한 사람은 에밀 시오랑이었다. 고종석의 「서유기」(문학과사회 봄호)를 읽는 동안 나는 잠시 에밀 시오랑을 생각했다. 그것은 소설 중에 그의 이름이 언뜻 나온다거나 또는 파리 거주 한국사람인 작중 화자의 처지가 어딘가 저 방랑하는 루마니아인의 처지와 흡사하다거나 해서만은 아니다. 시오랑의 아포리즘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투철한 회의와 냉소, 일체의 환상에서 벗어나려는 옹골찬 집념,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서유기」의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기」의 작중 화자는 파리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하고 있는 자칭 세계시민주의적 몽상가. 그의 주변에 세 사람이 있다. 서울에서 같이 살다 헤어진 전 부인, 동거중인 알제리 태생의 아랍계 여자 하스타, 통일운동조직에 가담한 결과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정태하가 그들이다. 작중 화자는 그들과 얽힌 사연을 인물별로 제시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에 관한 보고가 아니라 그들과의 사연을 계기로 표출된 작중 화자의 상념들이다. 그는 인종주의가 득세한 유럽 정세에서 한국의 경제개발 공과에 이르는 이슈들을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인습화한 환상들을 가차없이 간파하고 폭로하는 것이다.
「서유기」에서 반성의 표적이 되고있는 환상은 일차적으로 가족, 민족, 국가에 관한 통념들이다. 작중 화자는 가족에 집착하는 전부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하스나, 민족적 정체성에 얽매여 있는 정태하에게 각각 반성적 거리를 두면서 역사나 집단에 속박된 삶이란 자명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음을 인식하도록 자극한다. 그가 예시하는 것은 관습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소속에 대한 자유의 우위를 고집하는 정녕 근대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자발적 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유기」를 관통하는 개인적 자유의 이념은 어떤 독자들에겐 거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습된 사회적 관계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제휴를 추구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모더니티의 복음이다. 그것이 복음임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위가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에, 떼지어 부르는 애국가 소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서유기」는 인생에 대한 누대에 걸친 환상을 심문하고, 조롱하고, 격파한다. 그것은 시오랑적 의미에서 지혜로운 소설이다.<황종연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황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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