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들엔 유망한 부업으로 대학생엔 도전의 기회로 교사·공무원까지 본업은 제쳐둔 채 130여개사 200만명이 ‘너도나도’/그러나 실제 성공사례는 극히 적다는데…다단계 판매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판매망이 「리」단위 농촌마을까지 퍼져 가고 있고 대학생과 회사원, 주부, 각급 교사와 공무원들까지 「본업」을 제쳐 두고 다단계 판매에 열중하고 있다. 심지어 각 종교의 신도조직에까지 침투해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다단계 열풍이 일과성 현상이 아니라 분명한 사회적 동인을 가진 장기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돈이 최고」라는 전도된 가치관이 만연한 데다 고용불안으로 실업자가 늘고 자녀 과외비 때문에 파출부로라도 나서야 하는 상황이 다단계 판매 특유의 폭발력과 결합한 결과라는 것.
과천시의 L(36)씨는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 담임선생의 갑작스런 부탁을 받았다. 『다단계 판매회사의 제품을 사 달라고 해 거절하자 이름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어렵사리 거절을 했는데 며칠 뒤 또 전화가 왔어요. 없던 일로 해 달라는 거예요. 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 왔다나요』
경기교육청은 지난 2월 일선 초등학교에 「교사의 다단계 판매를 금지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판매원으로 등록하면 징계하겠다는 경고가 포함된 것이었다. 다단계 조직이 도내 일선 학교에 퍼지면서 교사들이 수업과 학생생활지도를 태만히 하는 것은 물론 학부모에게 물품을 강매하는 경우가 잦다는 진정이 쇄도한 결과였다. 교육부도 교사들의 다단계 열기로 말썽이 일자 최근 관계부서에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해선 부천시장은 지난 3일 다단계 판매원으로 가입한 시공무원들에게 탈퇴를 지시했다. 2월말 자체 조사 결과 전체 시공무원 2,300명의 약 7%인 152명(암웨이 151명, 뉴스킨 1명)이 본인 명의로 다단계 판매원으로 등록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시관계자는 『부인 명의로 가입한 경우를 합치면 훨씬 숫자가 많을 것』이라며 『다른 공무원 조직도 비슷한 사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시는 이들이 민원인들에게 회원가입이나 물품구입을 강요했는지 여부도 조사하고 있다.
군에서도 지난해 일부 하사관들이 다단계 판매원인 것으로 드러났으나 국방부는 『부인들이 주로 활동해 왔고 근무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학사회도 무방비 상태이기는 마찬가지. 명문대와 비명문대 구분이 없고 교수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서울대 가정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P(23)씨는 휴학을 하고 다단계 판매에 뛰어 들었다. 명문 서울 K대 모과 학생들은 아예 다단계 판매회사의 한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대학 관계자는 『취직이 어려운 운동권 출신 학생들이 다단계 판매에 뛰어 드는 경우가 많다』며 『전국적으로 10만명의 대학생이 손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종교계에도 다단계 판매가 침투해 조직자체의 성격을 흐리고 있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조욱종 신부는 일부 신도는 영업을 위해 성당을 찾는 것 같다고 개탄했다. 『부산교구의 한 청년조직을 담당하던 94년 가을 성실한 신도 1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다단계 판매를 시작했어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청년조직이 그대로 다단계 판매조직이 됐어요. 신도 조직인 「레지오」 단원 한명이 판매원이 되면 단원들이 모두 포섭돼요. 레지오별로 서로 다른 회사 판매원이 돼 반목·질시하는 풍조까지 생겼어요. 다른 종교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현재 국내 다단계 판매 유형은 크게 두가지. 정상적인 다단계 판매로 비내구 소비재를 소매점보다 싸게 공급하는 경우와 합법적인 업체로 등록해 놓고 피라미드 판매에 가까운 불법적인 영업을 하는 유형이다. 특히 후자는 교묘한 상술을 동원, 사이비 종교조직처럼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근절이 어렵다. 판매원은 스스로를 『좋은 제품을 소개하는 전도사』로 착각하고 있을 정도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김영락 목사.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벌게 해준다는 식의 「이타주의」로 포장된 고도의 상술을 동원해요. 그들의 집회는 신앙 간증과 닮았습니다. 판매왕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회원도 있어 교회의 부흥회로 착각할 정도죠』
「자본이 필요없는 유망 사업」 「무점포 거래의 꽃」이라는 다단계 판매는 실업자에게는 성공의 관문으로, 『더 이상 남편의 월급봉투에 매달릴 수 없는』 주부에게는 유망한 부업으로, 젊은 사업가를 꿈꾸는 대학생에게는 도전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다단계 판매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교회환경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전체 판매원의 1% 정도만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국내 다단계 판매원의 실태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실상은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부천시 중동의 주부 K(45)씨는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다단계 판매에 뛰어 들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운영하던 미용실까지 팔아 치웠다. 다단계 제품을 한꺼번에 사 놓았으나 물건이 팔리지 않아 빚만 잔뜩 졌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의 다단계 판매회사는 130여개. 전체 판매원 수는 150만∼200만명선이며 미국 암웨이사가 1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한 최대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다단계 판매를 전업으로 삼아 생활이 가능하려면 4, 5단계의 판매조직을 밑에 두어야 한다. 단계별로 5명의 판매회원을 두고 있다면 625명이나 3,125명이 돼야 하는데 쉬운 일일 수가 없다.
무리하게 돈을 빌려서라도 판매실적을 올리려다 파산하는 예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또한 다단계 판매 조직의 비대화 추세로 보아 개인의 좌절과 경제적 파탄이 누적돼 엉뚱한 사회적 혼란을 빚을 수도 있다.
서울 YMCA 시민중계실 신종원 실장은 『회원은 어떻게 되든 회사는 살찌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언젠가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단계 판매 회사의 공통된 메시지는 돈을 쉽고 빨리 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판매원중 99%는 중도에 그만두고 딴사람이 그자리를 메우게 됩니다. 그래도 회사는 돈을 벌지요. 또 회원수가 100만명을 넘어가게 되면 누구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압력단체나 정치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조재우 기자>조재우>
◎기업은 왜 다단계 판매 뛰어드나/부족한 유통망 확보에 도움/판매원은 커미션 챙겨 ‘누이좋고 매부좋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단계 판매회사는 「진로 하이리빙」 「LG생활건강」 등 대기업 계열사와 외국 업체를 포함해 130여개.
다단계 판매는 제조업체와 회원을 직접 묶는다는 점에서 얼핏 대형 할인점의 영업방식과 비슷하다. 다만 할인점은 여러 회사의 물건을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지만 다단계 판매는 누군가의 소개로 특정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론적 의미의 다단계 판매 방식은 소비자가 판매자 역할을 병행하기 때문에 점포임대료와 광고비 등 중간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애초에 80년대 미국에서 다단계 판매가 번질 때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맺어주는 유통 혁명」의 하나로 각광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는 할인점보다 더 싸게 상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다단계 판매 업체는 유통비용을 크게 줄이지는 못하고 있다. 업체는 할인점이나 슈퍼마켓과 비슷한 가격으로 물건값을 책정해 남은 유통비용을 각단계의 판매회원에 다양한 형태의 보상금으로 되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단계 판매망 각 단계의 보상금 합계가 판매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40%에 이르고 있다.
어쨌든 다단계 판매망에 가입한 회원은 물품 구입시 소액의 커미션을 받을 수 있어 할인점보다 더 싸게 사는 셈이 되고 판매업체는 할인점 이상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물품을 공급하는 제조업체는 부족한 유통망을 보완해 주기 때문에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된다. 대기업과 유통업체들이 다단계 판매에 매달리는 이유다.
한편 고가 내구재를 취급하는 중소 다단계 판매업체 가운데는 애초에 고수익의 변칙영업을 염두에 두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판매가격을 제조원가의 4, 5배로 해 놓고 판매원에게 30∼50%의 커미션을 약속한다. 수백만원어치를 사 판매원 자격을 얻기만 하면 한번 구매를 중개할 때마다 100만∼200만원의 수당을 받게 된다. 모든 부담을 떠안은 구매자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연쇄적으로 하위 판매원을 만들어 내는데 이를 이용해 커다란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 이들 업체의 목적이다. 이는 한동안 시끄러웠던 불법 피라미드 판매가 겉옷만 바꿔입은 것이다.<이진동 기자>이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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