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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노인들/탑골공원·남산·잠실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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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노인들/탑골공원·남산·잠실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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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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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수십명서 1,000여명까지 무료함 달래려 ‘출근’을 한다/점심은 라면·과자로 때우고 바둑을 두거나 얘기 나누며 또 하루를 보낸다서울 종로 탑골공원과 서대문 독립공원, 남산 힐튼호텔옆 계단, 장충단공원 등은 젊은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노인지대」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떠돌다 밀려 온 「외딴 섬」같은 공간. 노인들은 대개 교통이 편리하고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공원에 모여 든다. 노인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따로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장소에 따라 수십명에서 1,000여명의 노인들이 「출근」한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던 지하철 잠실역 분수대광장도 얼마전부터 노인들의 모임터로 떠올랐다. 롯데월드로 가는 통로로 커피숍과 카페 패스트푸드점으로 둘러 싸인 이곳의 나무벤치에는 어김없이 노인들이 앉아 있다. 화려한 젊음의 공간 한가운데 노인들만의 작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곳이 노인들의 모임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초. 추위를 피해 한두명씩 노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더니 몇달 지나지 않아 온통 노인들 차지가 돼 버렸다. 이곳을 찾는 노인은 하루 평균 200여명. 상오 10시부터 찾아오기 시작해 점심때가 되면 40여개의 벤치가 꽉 찬다. 서울은 물론 성남 분당신도시 등 외곽에서도 찾아 온다. 노인들이 이곳을 선호하는 것은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 때문. 롯데월드와 백화점 석촌호수 등 주변에 구경거리가 많은 것도 인기요인이다.

노인들은 대개 장기와 바둑으로 시간을 보낸다. 손수건에 그린 장기판을 벤치에 펼쳐 놓고 돌아가며 장기를 둔다. 가끔씩 점심내기도 벌어지고 구경꾼도 10여명씩 모여 들어 제법 북적거린다. 여기에 끼지 못하는 노인들은 대개 2, 3명씩 모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거나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벤치지키기가 심드렁해지면 백화점과 롯데월드 등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쐰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인들은 주변 분식점에서 찌게백반이라도 사먹지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돈이 없는 노인들은 100원짜리 초코파이 하나로 버티거나 아예 굶는 경우도 있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주변 교회 등에서 공짜로 한끼를 때울 수 있고 아예 무료급식을 하는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가기도 한다.

매일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배복근(80) 할아버지.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나면 온종일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적적해 1년전부터 이곳에 나오기 시작했어. 여기서 사귄 친구들과 얘기 나누는 것이 제일 큰 낙이야』 그에게는 시간이 빨리 가지않는 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하루종일 무료하게 앉아서 저녁이 오기만 기다려. 조용히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빈 집에 혼자 있기가 싫어서…. 아들 내외 퇴근시간에 맞춰 들어가는 게 나아』

하오가 되면 한쪽켠에서는 술판이 벌어진다. 2홉들이 소주병에 김치와 과자 빵 등 안주를 펴 놓고 남녀 노인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돌린다. 얼큰해지면 가끔씩 노랫가락에 맞춰 춤도 춘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거나 싸움을 하는 노인들도 더러 있다. 롯데월드 경비원 한암식(51)씨는 『연로한 분들이라 대부분 설득해서 귀가시키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지하철 경비대에 인계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아들과 떨어져 혼자사는 김봉희(66) 할머니는 운동도 하고 무료함도 달래려고 매일 이곳으로 나온다. 『지하철을 타고 교회와 성당을 돌며 1,000∼2,000원씩 용돈을 받고 점심도 얻어먹은 뒤 이곳에서 오후시간을 보내요』

뭐니뭐니 해도 서울에서 노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드는 곳은 탑골공원. 「노인문화의 메카」라는 탑골공원의 위상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겨울철에도 눈이 오지않는 날이면 매일 1,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와 서로 외로움을 달랜다. 날이 풀리면서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들의 발길도 한결 잦아지고 있다.

몇달전부터 탑골공원에 나오고 있는 구연흥(70) 할아버지는 혼자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40년간 목수일을 하다 5년전에 그만뒀지. 그후 의류매장 경비로 일했는데 3개월전에 감원 바람에 밀려 잘렸어. 평생 일하던 몸인데 집에서 놀고 있으려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직 얘기를 나눌 친구를 찾지못해 신문 보는 일로 소일할 수 밖에 없지만 달리 갈 데도 없어.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탑골공원은 점심값을 아끼려고 식사를 마친 후 출근하는 노인들이 많아 하오 2시부터 가장 붐빈다. 술취한 노인들의 고함, 노랫소리, 부정부패에 대한 성토와 정치토론 등으로 늘 시끌벅적하다. 내기장기 시비로 멱살잡이를 하거나 대선 후보를 점치다 설전을 벌이는 노인들도 있다.

탑골공원 출입 4년째라는 정영자(56·여)씨는 이제 노인들 얼굴만 봐도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유형인지 알아 맞출 수 있다. 『한곳에서 얌전하게 햇볕을 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은이 못지 않은 다혈질도 많아요. 매일 정치 이야기만 하는 노인들도 있어요. 그러다가 저녁 6시께 아쉬운 표정으로들 집으로 돌아가지요』

탑골공원 노인들의 「퇴근」시간인 저녁 6시. 집에 돌아갈 준비가 되지않은 듯한 노인들이 군데군데 외롭게 앉아있다. 『비오는 날에도 팔각정이나 처마밑에 모여드는 노인들이 꽤 있다』고 공원관계자는 말했다.<이상연·배성규 기자>

◎외손자 키우는 할머니의 하루/하루종일 애 보다가 잠자리 들면 온몸이 안쑤시는데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애 키우는 겁니다. 집안을 온통 휘젓고 돌아 다니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고 간혹 아프기라도 하면 밤새 보살펴야 해요. 하루 종일 애를 보고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안쑤시는 데가 없어요』

일 나가는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키우고 있는 일산신도시의 허행로(64) 할머니는 육아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애키우는 데는 이골이 났다.

그가 그동안 돌봐준 아이는 친손자와 외손자 등 모두 5명. 자식까지 합치면 7명을 키운 셈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친손자와 친손녀, 외손자에 이어 94년엔 친구의 부탁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까지 1년 남짓 키워 주었다. 95년 7월 딸이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딸집으로 다시 옮겨왔다. 아이가 7개월짜리 미숙아였던 데다 딸이 하혈이 심해 더이상 두고 볼 처지가 아니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 6시 동네청소로 시작한다. 경로당을 청소하고 아파트 주변을 돌며 쓰레기를 줍는다. 자유롭게 돌아 다니며 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상오 9시께 딸이 출근하고 나면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된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대소변도 때맞춰 뉘어야 한다.

『아이가 장난이 심하고 돌아 다니길 좋아 해 하루종일 따라 다니며 놀아줘야 해요.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뭔가를 부수거나 넘어져 다치기 십상이죠. 화장실에 갈 때도 문을 열어 놓고 지켜볼 정도예요』 밖으로 나가자고 아이가 떼를 쓰면 노인정에 데리고 간다. 아이가 어디로 도망갈 지 신경이 쓰여 이웃 노인들과 마음놓고 얘기를 나눌 수도 없다. 한두 시간 아이가 낮잠자는 시간에는 어지렵혀진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한다.

하오 2시께 초등학교 다니는 큰 외손자가 돌아오면 허씨는 더욱 바빠진다. 아이에게 우유 빵 라면 등 간식을 줘야하고 시간맞춰 학원에도 보내야 한다. 『2시30분에 영어학원, 4시40분에 주산학원, 6시에 피아노학원. 시간을 외워 놓고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에요. 계속 간식을 해먹여야 하고 같이 날뛰는 둘째 아이도 잡아 놔야 하거든요』 딸은 밤 9시가 지나서야 돌아오기 때문에 외손자와 사위 저녁도 챙긴다.

가장 힘들 때는 역시 아이가 아플 때. 다음날 일 나가야 하는 딸을 대신해 밤새 옆에 지키고 앉아 열을 재고 물과 미싯가루, 약을 먹인다. 『아이를 많이 키우다 보니 의사가 다 됐어요. 이제는 애 얼굴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을 정도랍니다』

늘 옆에 데리고 자기 때문에 아이가 조금만 뒤척여도 잠이 깬다. 수면부족이 날이 갈수록 견디기 어렵다. 요즘은 온몸이 결리고 아파 약까지 지어 먹는다. 『자식 키울 땐 먹고 살기가 바빠 정신도 없이 키웠는데 손자는 자식보다 더 신경이 쓰이고 키우기도 힘들어요. 딸이 돈벌이를 해야 하니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친손주든 외손주든 아이들이 예뻐 힘은 들어도 보람이 있어요』<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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