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황장엽 국제담당비서 일행이 18일 상오 베이징(북경)을 떠나 이날 필리핀에 도착했다. 한국망명을 희망하며 베이징주재 우리 총영사관에 피난처를 마련한지 35일만이다. 당초 정부가 예상했던 「1개월내 처리」방침이 사실상 관철된 셈이다. 따라서 황비서 일행은 얼마간 그 곳에서 머물다 한국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국직행은 관철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망명의 뜻이 차질없이 이뤄진 것은 그간 우리 외교당국의 노력과 국제법관례를 성실히 준수한 중국측의 배려의 결과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황비서같은 북한체제의 거물급 인사가 중국을 경유지로 하여 한국에 망명을 요청한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북한의 교조적 통치이념인 소위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망명이 시사하는 의미는 엄청나다. 이는 곧 주체사상의 탈북을 의미했고, 김정일체제의 붕괴조짐을 시사하는 단초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정부는 사회주의의 형제국인 북한과 유력한 경협파트너로 부상한 한국 사이에서 엄청난 외교적 줄다리기를 당했을 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자세를 평가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중 양국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더 한층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루어 나가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사실 한국도 83년 5월, 중국 민항총국소속 여객기가 납치범에 의해 우리 영토에 불시착했을 때, 승객과 승무원을 지체없이 송환한바 있다. 이번 사건이 이처럼 중국과 「상호주의에 의한 해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배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부가 중국측에 황비서 일행의 서울도착후 정치적 이용 자제를 약속했다는 보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전적으로 정부의 자업자득이다. 망명사실을 성급하게 발표, 불필요한 외교적 부담을 갖게 한 일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외교는 때로 조용히 할때 더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미 지적했지만 황비서문제를 국내정치카드화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것은 중국과의 약속 이전에 그간 망명, 귀순자처리 방식이 종종 일으킨 역작용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 야 할 사항이다.
아울러 북한도 남북간 긴장상태를 야기하는 이런 체제부정적 망명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군사적 맹종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인민생활의 질을 개선하는데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우리는 권고하고자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제3국의 체류시간이다. 조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지만 중국과의 약속에 너무 지배돼서도 안된다. 이제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은 망명자 황장엽의 자유의사다. 그리고 그가 망명을 원했던 대한민국의 주권국가로서의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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