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드라마서 영화·음악까지 번지는 환생… 귀신… 초자연… ‘열풍’/초정보화에 대한 반동적 회귀인가 소수 컬트문화의 확산인가록그룹의 공연장을 찾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청소년 관객들이 팔을 쭉 뻗어 검지와 새끼 손가락만을 편 주먹을 박자에 맞춰 흔든다.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으로 자리잡은 이 행위는 원래 악마를 숭배한다는 의미로 미국 록 그룹의 공연장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출판은 물론이고 TV와 영화, 대중음악, CF, 문화동호회에 이르기까지 신비와 악마, 외계와 초과학, 전생과 환생, 환상과 귀신이 세기말의 이 땅을 부유하고 있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용어들은 종교적 입장에서는 「사탄의 꾐」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기 언제쯤. 97년 3월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거기에는 「신비주의와 악마주의, 우주과학으로 이종교배된 한국의 세기말 현상」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 혹은 이성적이냐 아니냐, 종교적이냐 아니냐하는 이분법적 기준은 「세기말적」이라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소수가 열광하는 컬트 문화에서 신드롬으로, 다시 종교에 가깝다시피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 「천년의 사랑」에서 시작된 다분히 소녀 취향적인 환생 신드롬과, 컬트문화적 속성을 강하게 지녔던 「X파일」 신드롬은 어느새 죽음과 환생에 강하게 집착하는 오컬티즘(occultism·신비주의)과 악마주의, UFO(미확인비행물체) 연구, 초과학 연구 열풍으로 그 영역이 확산됐다.
최근 나온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저승의 백과사전」(열린책들)은 지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게헨나」, 지옥의 강 「스틱스」, 정토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 「아미타바」, 강신술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와 개념들을 사전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래를 밝히는 외계문명 시리즈」(대원출판) 역시 「내부로부터의 방문자」 「환생의 라이라」 「새로운 우주인간으로의 탄생」 등 제목은 다소 허황해보여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책들의 비과학성, 비이성성에 반감을 갖는다면 과학서들의 새로운 흐름은 어떤가? 「우주식민지」를 주장하는 미국의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의 「작고 푸른 점」이 베스트셀러에 장기간 머물고 있으며,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한 우주의 신비를 발견했다는 「초공간」(김영사)이 또다시 출간됐다.
그렇다면 왜 지금 악마주의, 신비주의인가?
문화평론가 김성기씨. 『문화의 통합기능이 약해지는 반면 타자(그간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소수문화)가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지면 이국 정서와 복고풍이 만연하고 소수 마니아의 관심사가 일순간 다수에게 전염된다』고 말한다. 그간 눌려온 소수, 혹은 하위문화의 발현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잔해로 이해할 수도 있다. 권위가 해체되고, 변방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가치관 속에선 마인드 콘트롤이나 요가, 명상과 기훈련이 모두 그럴듯한 대안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현상은 언제나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법. 학자들은 흑사병이나 매독같은 새로운 병이 나타났을 때, 태평성대가 지속해 인구가 급격히 늘었을 때, 새로운 사회적 계급이 나타났을 때, 세상엔 종말론이 퍼져왔다고 주장한다. 중세말 근세초의 마녀사냥은 근대, 이성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에 대응한 종교의 대응책이었으며,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19세기말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독점 자본에 대한 자유경쟁 부르주아지의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이다.
같은 논리라면 오늘의 세기말적 현상은 20세기말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시대적 의미와 아울러 생명 복제는 가능하지만 정작 살아있는 에이즈 환자를 구원해내지는 못하는 과학의 아이러니에 대한 조소일 수도 있다. 또 반도체와 컴퓨터로 이룩된 이 「사이버 바벨탑」 세상이 사소한 바이러스에 의해 동시에 「다운」될 수도 있다는 우려, 즉 초정보화 사회의 아이러니를 걱정하는 반동적 회귀현상일 지도 모른다. 이와함께 복잡해지고 비인간화하는 현실에서의 도피심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기말. 100년, 1000년 단위로 끊어 생각하는 서양의 시간개념. 그리고 예수가 태어나서 죽고, 세상에 종말이 온 후 다시 새로운 영광의 천년 밀레니엄(millenium)이 시작된다는 것과 지금 우리의 세기말적 현상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감히 「조물주」와는 대적하지 못할 귀신이나 도깨비 이야기가 우리 문화에 깊숙히 파고들었는데 악마, 사탄이라니 낯설다.
악마주의니 신비주의. 소수문화의 대책없는 확산. 상업주의와 이국정서의 혐의가 짙어 보인다.<박은주 기자>박은주>
◎대중문화속 세기말 현상/TV드라마 ‘X파일’이 기폭제/종말적 분위기 그룹 ‘크래시’ 팬클럽 10만여명
대중문화에 자리잡은 악마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의 사례들은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흡혈귀가 등장하는 공포영화들과 헤비메탈 등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 혹은 경배를 기반으로 한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공상과학)영화들과 프로그레시브, 뉴에이지 음악은 모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이한 것은 서양에서의 주변적인 흐름으로만 여겨졌던 이런 대중문화의 경향이 최근 몇년동안 우리나라에서 열풍처럼 불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SF 문학 등이 오랫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던 우리 문화계에서 귀신쫓는 이야기인 소설 「퇴마록」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 「은행나무침대」 드라마 「8월의 신부」 CF 「천년후애」 등 전 장르를 망라한 환생신드롬이 한바탕 물러간 후 TV에서는 「알고보니 모두 귀신때문이더라」는 식의 코미디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정규적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만득이 시리즈」에서 귀신은 급기야 늘 붙어다니는 친구처럼 등장하면서 코믹화했다.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허영만의 「블랙홀」, 박원빈의 「공포의 차크라」같은 만화들 역시 신비주의의 텍스트로 확고한 세력을 확보했다.
90년대 최고의 대중스타 서태지는 70년대 외국 록그룹들이 심심찮게 받던 「악마숭배」의 시비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렀다. 그의 레코드를 거꾸로 돌리면 「피가 모자라…」라는 가사가 들린다는 것이다. 악마숭배의 헤비메탈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데스메탈(death metal)을 앞세운 그룹 크래시는 10만여명의 팬클럽을 거느리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은 역시 「X파일」 돌풍이다.
미국 20세기 폭스사가 만든 이 TV드라마 시리즈는 미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데 이어 국내에서도 일시 종영 후 시청자들의 거센 요구로 속편이 방영되는 등 컬트화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FBI(미 연방수사국)가 통상적인 수사로는 불가능한 미제 사건들을 추적하고 이를 둘러싼 음모를 파헤친다는 것이 이야기 뼈대. 외계인, 4차원의 세계, UFO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소재로 다뤄 현실과 환상을 오간다. 인터넷에서는 이 드라마를 주제로 한 게임이 등장하고 관련 웹사이트만 수백개에 달한다. 「ET」나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류의 본격 SF도 아니고 리얼리즘 드라마로도 분류할 수 없다. 이 드라마는 각종 불가사의에 관련된 내용과 함께 결국에는 『진실은 저기 바깥에 있다』는 모호하고 음울한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신비함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이같은 열풍에 힘입어 각종 대중 매체들이 마치 유행상품의 시리즈처럼 신비함과 괴기스러움들을 쏟아내면서 이런 경향이 출발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혹은 두려움의 반영」이라는 당초의 의도는 역설적으로 퇴색한 셈이 됐다.
대중들은 매일 TV로 「환상 특급여행」을 즐기고, 「이야기 속으로」(이상 MBC)에 빠져들며, 거무죽죽한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공연장에서 의미없는 악마숭배의 주먹질을 한다. 관습화하고 포장된 신비주의와 악마주의를 즐기는 그들에게 이것은 또다른 새로운 「유행」의 하나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이윤정 기자>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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