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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명답으로 읽는 조선과거실록’/지두환 교수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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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명답으로 읽는 조선과거실록’/지두환 교수 국역

입력
1997.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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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금 나라에 시급한 일은?”/답 “임금 실수가 국가의 병이오”/성삼문서 송시열까지 각 시대 대표인물의 시험답안지를 읽는다광해군이 즉위 3년째(1611년) 비정기 과거인 별시를 치렀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현안에 대한 해결방안을 묻는 시험과목인 책의 문제를 『내가 기업을 이었으나 지혜와 현명함이 부족하다. 인재를 구하는 것, 공물을 쌀로 바꾸는 것, 간척사업, 호적 정리 외에 시급히 힘써야 할 것이 있는지 각자 그 뜻을 나타내 보아라』는 요지로 냈다.

임금이 친히 시험장에 나오는 전시. 일개 서생이던 임숙영은 이렇게 답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처해 있는 나라의 큰 우환과 조정의 커다란 병폐를 문제로 내지 않으셨으니 신은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자잘한 일 때문에 원대한 것을 도모하지 않으며, 이를 덮어두기만 하고 논하지 않는 것입니까… 임금의 실수는 국가의 병입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신중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신은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대답합니다』

한마디로 정신 못 차리는 임금이 가장 화급한 문제라는 것이다. 임숙영은 병과 말석으로 급제했다. 광해군이 낙방시킬 것을 명했으나 사관들이 그 서슬 퍼런 광해군의 명에도 불구하고 급제를 주장해 합격했다는 것이다.

고려 광종 9년(958년)에 시작해 갑오개혁(1894년)으로 사라질 때까지 1,000여년동안 시행된 인재의 등용문이었던 과거. 사서삼경을 달달 외고 적당히 시문이나 읊조리면 급제할 수 있는 고루한 시험으로 인식되는 과거이지만, 10세기 가까이나 인재선발제도로서 지속됐던 것은 임숙영 같은 이들과 그들을 뽑을 줄 아는 선조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요즘의 관련정책을 되돌아보게끔 하는 대목이다.

지두환(45)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가 한글로 옮겨 엮은 「명문명답으로 읽는 조선과거실록」(동연간)은 임숙영을 포함한 조선시대 사상가·학자·정치인들의 과거 급제 명문 23편을 실은 책이다. 하위지 성삼문 신숙주 조광조 이황 정철 이이 윤선도 송시열 등 시대를 대표했던 인물들의 시험 답안지인 셈이다. 기존에 국역된 서너편을 빼고는 모두 초역된 것이라 이 책은 더욱 소중한 결실로 보인다. 훌륭한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다.

과거는 문 사 철을 겸비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지식인 아닌 지성인을 뽑는다는 취지의 시험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해도, 문제인 책문과 답안인 대책이 모두 가히 당대를 대표하는 시무요 사상이다.

창업의 세기였던 15세기에는 지극한 정치에 이르는 길, 시대에 알맞는 제도, 법의 폐단 구제의 방법, 중흥의 도리들을 묻는 질문이 주류였다. 성리학이 확립된 16세기에는 술의 폐해를 구제하는 방법, 기강과 법도를 바로 세우는 길, 사치 풍조의 근절대책, 인재를 기르는 도리 등에 대해 신예들의 해답을 구하고 있다. 문화 융성기를 맞았던 17세기에는 도참설을 믿을 수 있는가, 가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나랏일, 음양의 도리, 임금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를 묻는 질문들이 눈에 띈다.

세종 29년(1447년) 치러진 중시에서 성삼문과 신숙주의 답안이 흥미롭다. 법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성삼문은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법은 그 도구다. 법만 뜯어고칠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사람이 바른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하면 법의 폐단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는 요지로 답했다. 신숙주는 「법의 폐단은 잘못된 시행에서 오는 것이니, 언로를 열어 직언을 받아들이고 적임자를 등용하며 바르게 시행하면 법의 폐단은 절로 사라질 것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장원급제, 신숙주는 을과 급제했고 이들은 후에 정반대되는 정치행로를 걸었다.

율곡 이이의 천도책은 과거 사상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힌다. 명종19년(1564년) 식년시에서 「해와 달의 운행, 천기 등 자연의 이치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고 물은 책문도 지금 시대에 읽으면 참으로 고풍스럽지만 율곡은 답안에서 사실상 그의 주기론의 단초를 내보였다. 「만화의 근본은 하나의 음양일 뿐이어서 기가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되며 한번 동하고 정하는 것은 기이고, 동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이다.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기 하나의 기운이지만 합하여 말하면 천지만상이 동일한 기운이다…」

역편자 지교수는 「국조방목」에서 과거 급제자 명단을 조사, 「한국문집총간」과 개인문집에서 120명 412편의 책문과 대책을 찾은 뒤 초역한 것 중에서 우선 23편의 명책문과 대책을 골라 이 책에 수록했다. 주석을 꼼꼼하게 달았고 부록으로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 색인을 실어 일반독자는 물론 전문적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말미에는 원문을 볼 수 있는 영인본도 붙여놓았다. 지교수는 412편의 책문과 대책 모두를 「역주 과거실록」이라는 13권짜리 책으로 올 하반기부터 5년여에 걸쳐 출간할 계획이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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