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듯한 살림 쪼개 학원비에 교육보험/맞벌이부모 많아 청소년 탈선도 심각빈민층도 교육열에서는 어느 계층 못지 않다.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자녀의 대학진학이기 때문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7동에 사는 H(40·노동)씨는 『현재의 가난은 순전히 내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의 공부는 앞으로 무슨일을 해서라도 뒷받침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국도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이 계층의 지출내역 가운데 식료품비 다음으로 많은 것이 교육비다. 70년 빈민층의 가계비 지출 내역에서 교육비 비율은 2.2%에 불과했으나 90년에는 20.3%로 급증했다. 반면 식료품비는 70년 63.1%에서 31.8%로 비중이 크게 떨어졌다.
이호 연구원은 『80년대 중반이후 급격히 늘어난 사교육비가 빈민층의 가계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며 『가계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액수는 중산층과 비교할 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달동네 주민들 대부분은 자기 세대에서 가난을 벗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희망을 자녀들 세대에 건다. 어려운 살림에도 아이를 선뜻 학원에 보내고 교육보험에 들어 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기란 쉽지 않고 막상 대학에 들어가도 경제적 부담을 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신림7동에 사는 K(45·여)씨는 지난해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입학금과 등록금을 대지 못해 땅을 쳐야했다. 그는 『1평 남짓한 다락방에 틀어박혀 밤늦게까지 공부했는데 못난 부모가 그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어 버렸으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가 맞벌이 때문에 생기는 청소년 탈선문제도 심각하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모의 관심과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중·고생 자녀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신림7동에 사는 L(68)씨는 『뒷산이나 빈집 등을 돌아 다니며 본드나 부탄가스를 흡입하고 남녀관계를 맺는 애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며 『중·고생 탈선행위는 방과후 방치돼 있는 초등학생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함부로 쏘다니지 말라고 혼내주고 싶어도 지친 몸으로 밤늦게 귀가하다 보니 그냥 곯아 떨어지게 된다』는 H씨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김성호 기자>김성호>
◎빈민 협동조합운동 활발/‘빈곤의 사슬’ 뭉쳐서 끊는다/200만∼300만원씩 출자 공장·마을금고 등 차려/“같은 처지 사람들 모이니 능률·완성도도 높아”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를 딛고 공동의 자립기반을 마련하려는 빈민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송학마을 102세대 주민 400여명은 원시공동체를 연상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다. 재개발아파트 건설현장 옆의 공원부지에 임시로 마련한 2층 조립식 건물 9개동이 이들의 보금자리. 가구당 200만∼300만원씩을 들여 건설한 마을이다.
매달 1, 2회 주민총회를 열어 현안을 논의하고 공동사업계획을 두고 토론을 벌인다. 마을 공동시설 1층에는 주민들이 공동출자한 봉제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협동조합형태로 운영되는 이 공장은 10여명이 모두 주인이자 일꾼이다. 각각의 숙련도에 따라 정해진 월급을 받고 수익금은 일체 공장에 재투자한다. 정식 법인은 아니지만 「논골신협」이란 이름의 마을금고를 내부적으로 세워 저리의 신용대출도 해주고 있다.
주민 문영기씨는 『지역사회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각종 협동조합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도시빈민들끼리 뭉쳐 살아간다면 사회·문화적 소외감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봉제공장 「실과 바늘」은 노원구 강북구 지역의 빈민들이 뭉친 의류생산협동조합. 대한성공회가 운영하는 사회봉사기구 「나눔의 집」이 직원모집 및 관리를 돕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 가족을 중심으로 9명이 모여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월급외의 이익금은 똑같이 나눠 갖는다.
나눔의 집은 또 이 지역 서민 가운데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푸른 환경」이란 청소용역 회사도 설립, 4월께부터 일에 들어 갈 계획이다.
이밖에도 관악구의 「나눔물산」 「공동체 한백」 등이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협동조합식의 공장을 운영하며 지역 빈민층의 결속을 돕고 있다.
협동조합연구소 김성오 부장은 『빈민층 협동조합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하기때문에 작업능률이나 완성도가 높다』며 『앞으로 경제적 이익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철거 앞둔 중학생의 고민/좋은 옷·학용품은 탐나지 않아요/공부만 하면되는 환경이 부러워요
경기 광명시 H중학교 3년생인 천덕영(15)군은 요즘 걱정이 태산같다. 10년 넘게 살아 온 보금자리가 8월께 철거될 예정이기 때문. 『이웃끼리 정답게 지내고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릴 수도 있었는데 왜 우리 동네를 철거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 서울의 달동네에서 살다가 집이 철거돼 이리로 왔는데…』
그의 집이 있는 철산4동의 달동네는 이미 절반이 폐허로 변했다. 아버지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지만 집 걱정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가족은 70세가 넘은 할머니와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42), 두살 아래 남동생이 전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주 부부싸움을 하더니 결국 2년전에 이혼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주된 이유였다. 어려운 때일수록 어머니가 보고 싶지만 어린 동생 때문에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도 자꾸 눈물이 난다.
『「왜 우리는 이렇게 못사나」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우리반에도 저처럼 철거 걱정을 하는 친구가 7, 8명은 돼요. 잘사는 집 애들이 부러워요. 좋은 옷입고 비싼 학용품 쓰는 건 부럽지 않아요. 단지 공부만 하면 되는 환경이 부럽습니다』
천군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을 입시준비 학원 삼아 자주 찾는다.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에 실업계 고교 진학을 바라는 아버지를 설득해 왔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상태다. 『돈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부자가 됐는 지 궁금해요. 아버지나 이웃집 아저씨들을 보면 정말 열심히 일하는 데도 늘 가난하거든요』
천군은 누구도 가난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착하게는 살고 싶지만 그러다간 또 가난해질 것 같아요. 하지만 먼 훗날 내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적어도 가난만큼은 물려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달동네 L씨의 가계부/그릇행상 월 150만원 벌어 85만원 지출/술·담배 안하며 모은 돈이 4,000만원
서울의 몇 안남은 달동네중 하나인 관악구 신림7동에서 보증금 1,200만원의 전세방에 살고있는 L(51)씨. 89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다 실패해 이곳으로 옮겨 와 「이동식 그릇장사」로 살고 있다.
부인과 함께 봉고차를 몰고 다니며 식기 냄비 주전자 등을 팔아 월평균 150여만원의 수입을 올리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장사가 시원찮다. L씨 가족의 월 지출액은 85만여원. 쌀 부식 양념 등 식료품비 25만원, 전기·전화·수도료와 연료비(연탄 LPG) 20여만원, 자동차 유지비 20여만원, 딸 용돈 15만원, 약값 5만원 등이다. L씨 부부는 당뇨병 신경통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어 약값이 고정적으로 들어 간다.
뭉칫돈이 나가야 할 때도 적지 않다. 93년 부인의 유방암 수술비로 250여만원, 95년 A전문대에 입학한 아들의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400여만원을 썼다. 아들은 1학년을 마친 뒤 군에 가 있다. 지난해 D전문대에 입학한 딸의 한 학기 등록금도 170여만원에 이른다.
L씨는 『가끔씩 면회를 가 용돈으로 5만원을 주면 아들은 2만∼3만원을 되돌려 준다』며 『열악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자라준 애들이 대견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L씨는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새옷을 사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옷은 바자 등에서 1,000∼2,000원을 주고 샀고 자개농은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가져왔다. 한푼 한푼 모은 돈이 4,000만원을 넘어섰고 앞으로도 근검절약하면서 살아갈 결심이다.<김성호 기자>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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