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봉천3동/거미줄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당장 쓰러질듯 다닥다닥붙은 집들/공터마다 쌓인 쓰레기·연탄재/생활은 힘겨워도 정이 넘치는데…/철거의 먹구름이 곧 이 동네에도굽이굽이 휘어진 좁은 골목을 따라 높다랗게 뻗은 계단을 오르면 하늘과 맞닿은 동네를 만난다. 달이 가깝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 「달동네」. 서민들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서울의 달동네 대부분이 철거됐지만 관악구 봉천3동은 아직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마을」 꼭대기에 오르자 달이 한결 커다랗게 보였다.
폭 2m정도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 양쪽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집 한채에 문만 3, 4개 달아 놓은 것 같은 집들이다. 유리창은 깨어져 비닐을 댄 집이 많고 문패 대신 시멘트 벽에 이름과 번지를 적어 놓았다. 지붕에는 빗물을 막는 비닐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벽돌 7, 8개가 얹혀있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어김없는 개짖는 소리. 맞벌이 부부가 많은 이마을에서는 견공들이 집단속을 하는 모양이다.
좁은 길을 멀리까지 올라가야 하는 탓에 쓰레기 수거가 원활할 리 없다. 조그만 공터라도 있으면 으레 쓰레기장이 된다. 대문 옆이나 공동화장실 부근에는 연탄재와 쓰레기 봉투가 수북이 쌓여있다.
취학전 아동이나 초·중등학생들은 뛰어 놀 공간을 찾아 집에서 한참 떨어진 큰 길까지 내려간다. 노인들도 마찬가지. 달동네 중간중간에 수평으로 난 「큰길」은 이곳 사람들의 공동 마당이다.
달동네 주민들은 한곳에 자리를 잡으면 10여년 이상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이웃끼리 사이도 좋다. 방에서 창문만 열면 손을 뻗어 노크할 수 있을 만큼 옆집이 가까와 창문을 통해서도 가벼운 대화는 나눌 수 있다.
봉천3동 달동네에는 3,000여세대, 1만여명이 모여 산다. 주민 70%가 세입자일 정도로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단순 노무직 종사자가 많은데다 맞벌이 부부나 결손가정도 많아 아이들 교육문제가 심각하다. 가정교육의 부재와 교육비 증가에 따른 배움 부족이 곧잘 아이들을 빗나가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생활고와 아이들 문제로 모두가 우울하게 사는 것만은 아니다. 18년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김문환(48·미화원) 이금순(41·여·회사원)씨 부부는 한달 150여만원의 수입으로 중고생 아들 2명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다. 800만원짜리 전세인 김씨집은 2평가량의 방 2개, 방과 방을 연결하는 한평정도의 통로겸 부엌으로 이뤄져 있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고 욕실이 없는 것이 흠이지만 이씨는 사는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게 말했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쌀을 가마니로 사 놓고 먹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는 않아요. 밥 세끼먹고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잠자고, 죽을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부자나 우리나 똑같잖아요. 그저 식구들이 지금처럼 모두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어요』
이씨는 매달 40만원씩을 꼬박꼬박 저축한다. 두 아들에게는 3만원씩, 남편 김씨에게는 용돈과 교통비를 포함해 30만원을 준다. 『한달에 한번씩은 가족끼리 꼭 외식을 하고 비디오 테이프도 일주일에 한번은 빌려서 함께 봅니다. 규모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하면서 사는 것아닌가요?』
작은 공간이지만 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은 모두 있다. 20인치 TV와 VTR, 대형냉장고와 전기밥솥 보온밥통이 있고 중고이지만 세탁기도 장만했다. 『고위층과 재벌의 비리 얘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이곳도 내년 봄께 철거될 예정이다. 주부들은 모이기만 하면 집 얘기를 하다가 해가 진다. 이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저금한 돈을 모두 합하면 3,000만원 정도는 되니까 다른 곳에서 전세로 살 수는 있을 거예요. 정든 곳을 떠나기 싫고 이웃과 헤어지기도 싫지만 그래도 옮길 능력이 되는 우리는 행복한 편이지요』
◎개포동 구룡마을/전세금조차 없어 전전하다 형성된 무허가 가건물 2,000여세대/하루하루 힘겨운 나날 보내는 무연고자·자식에 버림받은 노인…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펼쳐져 있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산 자락에도 영세민들이 모여들어 만든 구룡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폐자재와 비닐, 골판지 등으로 지어진 400여동의 무허가 임시 가건물에는 2,076세대, 7,000여명의 「집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대개 전세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서울과 수도권지역을 전전하다 흘러 들어 온 사람들이다. 이중에는 연고가 없거나 자식들에게 버림받아 혼자사는 무의탁 노인들도 50명 가까이 된다.
88년 남편과 사별한 후 이 마을에 들어 온 무의탁 노인 이복례(70) 할머니는 5평 남짓한 움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할머니는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도 힘겹다. 한달 생활비는 36만원선. 양재동의 아파트단지에서 청소일을 하고 이돈을 받는다. 쌀값과 교통비, 연탄값, 전기세 등을 내고 나면 한푼도 남는 돈이 없다.
반찬은 나물 한두가지를 제외하면 간장과 고춧가루가 전부다. 올겨울엔 김장도 못해 김치맛을 못보고 넘어 간 날도 많았다. 손이 터도 화장품 한번 못바르는 것은 물론 과일 하나도 사먹을 처지가 못된다. 점심은 도시락을 싸가지만 반찬도 없이 싸늘하게 굳어버린 밥을 먹다보면 목이 콱 메이곤 한다. 가구와 커튼, 그릇, 이불 등 살림살이는 아파트촌에서 줍거나 얻어왔다.
『30분에 한번씩 다니는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추위에 떨며 일할 생각을 하면 아침마다 걱정이 앞서요. 하지만 그나마 청소일도 자리가 없을 때가 많아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청소용역업체에서 채용을 꺼려해 작년에는 4차례나 해고당했다. 할 수 없이 「빈병줍기」로 생계를 잇기도 한다. 하루종일 주워 봤자 몇천원도 벌기 힘들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겠지만 무허가 가건물 거주자는 주민등록이 되지 않아 그것도 힘들다. 17년전 감전사고의 후유증으로 밤마다 온몸이 터져나갈 듯이 저리고 아프지만 병원에는 갈 생각도 못한다. 4년전 왼쪽팔이 부러졌을 때도 집에서 혼자 부목을 감고 버텼다. 『온몸이 저릴 때마다 중풍이 오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철렁합니다. 내팔자에 호강은 바라지 않아요. 그저 직장 안 떨어지고 추한 꼴 안 보이고 죽는 게 바람입니다』<염영남·배성규 기자>염영남·배성규>
◎소년가장 손주환·성환 형제/“입양된 누이동생 보고싶어요”/교통사고로 아버지 잃고 어머니 가출/7순 앞둔 할머니와 빠듯한 생활/성환이의 장차 꿈은 요리사 “맛있는 음식 맘껏 먹을 수 있어서…”
『영란이를 보고 싶어요. 다섯살 때 어떤 집에 입양됐는데 3남매가 모두 중학생이 될 때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6년이 지났으니 얼굴도 많이 변했겠죠. 공부는 잘 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궁금한 게 많아요』
손주환(13)·성환(12) 형제는 가난 때문에 누이동생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서울 강서구 가양2동 도시개발아파트에서 할머니 김말순(68)씨와 함께 살고있는 이들은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입지는 못하지만 꿋꿋하게 살고 싶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89년 2월 포항에서 막노동을 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숨졌고, 어머니는 3개월 뒤 보상금을 들고 집을 나가 버렸다. 김씨는 졸지에 고아가 돼 버린 3남매를 키우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 생계가 막막해져 손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91년 서울의 큰아버지 집으로 올라 온 형제는 지난해 6월 영구임대 아파트에 당첨돼 130만원의 보증금을 내고 이곳으로 이사왔다.
『몇달 전 주환이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영양상태가 나빠서 그런 것 같다고 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고기를 잘 먹고 좋아하는데 매일 채소만 먹이니…』
할머니 김씨는 『용돈은 커녕 옷 한벌 제대로 사줄 수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의 월평균 생활비는 정부 보조금 30여만원과 큰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10만원 등 40만원. 아파트 임대료 및 관리비 10만원을 내고 나면 실생활비는 30만원에 불과하다. 김씨는 『애들의 대학진학에 대비해 돈을 좀 모아놔야 하는데 여유가 없어』 가장 답답하다.
형제는 자신들을 도와 주는 쌀가게 주인 박광룡(45)씨에게 훗날 꼭 은혜를 갚을 생각이다. 가끔씩 쌀과 닭고기 등을 갖다 주던 박씨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주환군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점심을 사준 뒤 용돈까지 줬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가방도 선물했다.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와 함께.
컴퓨터를 잘 다루는 주환군의 장래 희망은 과학자. 경찰도 해 보고 싶지만 내성적인 성격탓에 잘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활달한 성격의 성환군은 오래전부터 1급요리사를 꿈꾸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가 이유이다.<김성호 기자>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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