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새 지평/삶이 응축된 즉흥의 선/40여년 비구상 수묵화 작업/서울대 화맥의 중추/고희 앞두고 한시집 출간계획도산정 서세옥(68). 광복이후 그의 이름은 늘 화단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왔다. 그의 그런 역할은 자신이나 국내 미술의 발전에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49년 제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그는 58년 전위적인 작가들의 모임인 묵림회를 창설, 현대적 문인화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 됐다. 뿐만아니라 25세에 서울대 미대 교수, 32세에 국전심사위원에 이어 미협 이사장을 거친 서울대 화맥의 중추이다.
누구보다 화려한 업적과 명성을 쌓은 산정은 그러나 대표작이 없다. 아니 대표작을 말하지 않는다. 『새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는데 신경쓰다 보니 과거의 작품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또 작품마다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자신있게 내놓기도 힘듭니다』. 대신 40년 이상 추구해온 비구상 수묵작업 「사람들」시리즈의 의미를 강조한다. 한국화하면 산수화를 떠올리던 50년대에 점과 선, 발묵효과를 이용한 비구상 한국화는 기성화단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산정은 『전통한국화의 모방의 틀을 깨기위해 단순한 점과 선의 세계에서 출발했다』며 『먹을 뿌리고 흘리는 원초적 행위로 인간의 진솔한 모습을 표현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개인전은 작품세계가 성숙하고 변모했을 때 공개하여 편달을 얻는 자리」라는 지론에 따라 74년에야 비로소 첫 개인전을 통해 고고하면서도 묵직한 예술세계를 선보였다. 그리고 한참 뒤인 89년과 96년 작품전에서 오랜 명상과 사유의 흔적을 「사람」의 모습으로 빚어놓았다. 사람 인자를 직선 또는 원으로 병렬시키거나 사방으로 연결한 작품들은 그의 말대로 「삶의 축약」 또는 「삶의 표정」이다. 사람들이 그물처럼 서로 얽히는가 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울리는 형상으로 삶의 고통과 환희, 갈등과 화합, 긴장과 휴식을 최대한 압축해서 묘사하고 있다. 근작으로 올수록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해학과 익살이 묻어나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프랑스평론가 미셀 누리자니는 이를 두고 「아름다운 조화, 아취와 섬광의 미」라고 극찬했고 오광수씨는 「즉흥적으로 펼친 생명의 리듬」이라고 평했다.
『이제 겨우 붓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진다』는 산정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세가지 덕목을 제시한다. 비온 뒤 갠 날처럼 맑은 정신상태, 사물을 보는 독창적인 시각, 붓과 먹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이다. 이 중에서도 작업에 임하는 자세를 「독파상과돌진개」라는 한시의 한구절로 설명하고 있다. 홀로 서릿발 같은 창(붓)을 잡고 적진(캔버스)을 돌파해야 한다는 의미.
산정은 올해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6월 스위스 바젤아트페어, 9월 미국 뉴욕카운티 뮤지엄초대전을 계기로 세계적 작가의 위상을 굳히는 것과 오래전부터 중국의 출판사 「중화서국」에서 요청받은 한시집출간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에도 팔뚝보다 굵은 붓을 힘차게 휘두르는 모습에서 「선으로 선의 경지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최진환 기자>최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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