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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본보 특별대담/“위기가 기회돼야”(나라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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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본보 특별대담/“위기가 기회돼야”(나라 살리자)

입력
1997.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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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시련 이겨내는 힘 있어/호불호 떠나 지도자에 성원 필요/민심 바로읽지 못하면 국민은 정부에 등돌려/지도층부터 고통분담 실천하길/먼저 용서해야 맺혀있는 한풀려각계 원로 85명이 서명한 시국관련 성명서를 김수환 추기경이 기자들 앞에서 낭독한 것은 지난달 12일의 일이다. 내용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애국적 결단」을 대통령에게 촉구한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 김추기경은 예정된 미국방문 여행을 떠났다. 가톨릭 LA대교구 주최의 종교교육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시작된 미국내 일정에서 김추기경은 곳곳의 한인사회를 접촉할 때마다 한보사태에 휩쓸린 나라 형편을 걱정하고 국난의 슬기로운 극복을 호소했다. 어느때나, 또 어디에서나 『나라 살리자』는 절절한 호소는 추기경의 화두였다. 스무날 가까운 여행일정을 마무리 한 2일 시애틀의 한인성당 사제관에서 추기경은 서울에서 찾아간 한국일보와 만났다. 그는 『국민 사이에 「나라 살리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이 위기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밟혀도 일어나는 잔디의 힘,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그런 힘을 믿는다』고 말했다.

□미 시애틀=정달영 심의실장 대담

조금 전 시애틀 한인성당의 주일미사를 집전했던 김추기경은 미사 끝에 신자들에게 「선물」을 했다.

『그냥 돌아가기 서운해서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노래 선물입니다. 「애모」는 애몬데 좀 다른 애몹니다』

「애모」는 지난해 가톨릭대학에서 열린 「열린 음악회」에서 김추기경이 부른 김수희의 노래 제목인데, 시애틀에서 가라앉은 피곤한 목소리로 부른 「애모」는 그것이 전혀 아닌 자작곡류.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로 시작하는 노래를 그는 정말로 열심히 불렀다.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하느님 난 당신을 느껴요/하느님 난 당신을 좋아해요/오 하느님 난 당신을 사랑해요/하느님 내겐 당신이 필요해요/하느님 내겐 당신이 소중해요/하느님 나를 포근히 안아줘요/오 하느님 내곁에 늘 있어줘요/때때로 고난이 나를 찾을 때 피하고 싶은/내 마음 당신을 멀리 떠났다 느껴도/어차피 그것 또한 당신의 품안인 것을/난 알아요/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하느님 난 당신을 느껴요/하느님 난 당신을 좋아해요/오 하느님 난 당신을 사랑해요』

이 파격적인 「선물」을 받으면서 신자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추기경의 목소리는 더 탁해졌다. 사제관으로 옮겨앉은 자리에서 추기경은 떠나 있었던 사이에 서울에서 일어난 몇가지 「속보」와 그 분위기를 기자에게서 들었다. 몹시 피곤한 모습.

―대통령의 취임 4주년 담화를 보았는지. 국민에게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사죄했는데.

『미국 신문의 보도만 보았다』

(대통령의 자세나 태도는 진솔해 보였으나, 여론은 그런 그의 사죄의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기자의 의견을 듣고)

○사죄 받아들여야

『지난번 면담(1월17일)때, 대통령은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심경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용의를 표명했는데, 그것은 상당한 고뇌의 시간을 겪은 다음에 나온 생각이었을 것이다』

『여행중에 초대되어간 여러 자리에서 내가 소개될 때마다 외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환영하는데, 초대한 당사자이기도 한 한국동포들은 거의 누구도 일어나는 이가 없었던 일이 비교된다. 미국 국회에서 미국대통령이 환영받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다. 호불호를 떠나서, 지도자에게 성원을 보내고 격려하고 밀어주는 태도를 우리는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다. 한보사태의 의혹이 풀리고 풀리지 않고를 떠나서,그런 것과 관련 없이도, 대통령이 국민앞에 사죄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일단은 그 용기를 받아들여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문제는 한보의혹의 핵심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의 사죄와는 별개로 한보의혹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 못주는 세태

『이른바 「김현철 의혹」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야당측은 「의혹」에 대해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검찰 수사 결과가 여러모로 부실하다고 하므로 이 기회에 그 「증거」를 제시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실체」나 「몸통」에 대해서도, 그러한 「실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부도를 내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그로써 이런 엄청난 국가적 혼란을 초래하도록 방치했느냐 하는 점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세상의 의혹과는 다른 가능성을 말씀하는가.

『그럴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보의 뇌물공세와 로비력이 탁월한 것이었다고 하므로 더욱 그러하다. 이제는 검찰수사가 짜맞추기인 이유, PK검찰이라서 믿지 못한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도 물적 증거를 내놔야 한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은 믿음을 주지못하는 오늘의 세태다』

―국민의 정부 불신은 어디서 온 것인가.

○절호의 기회 놓쳐

『지도자가 민심을 바로 읽지 못하면 국민은 지도자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1월7일에 있었던 김대통령의 연두회견은 그런 뜻에서 아쉬움이 컸다. 우리가 놓인 처지가 어떤 환경인지,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정이 왜 필요했는지, 우리가 나라를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를 대통령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진정을 다해서 자신의 의견을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는 지나치게 자신있는 태도로 그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국민감정의 전달을 가로막는 「장막」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직접 만났을 때,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의 몇몇 조항이 청와대→국무회의→당을 오가면서 변질됐다는 이야기에 대해 대통령이 「나도 몰랐습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문제는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형편이다. 아무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긴박하다. 검찰도 정부도 대통령도 힘을 잃은채 나라가 표류하는데 대해, 정치인들은 방관하고 언론도 합세하면 이 나라는 누가 붙잡아 살리는가. 나는 언젠가 관훈클럽에서 답변하는 중에 김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란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의 임기는 이제 1년도 채 안남았다. 레임덕 현상을 걱정한다고 하면서 깎아내리기만으로 그를 아무런 권위도 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그를 향해 어떻게 나라 살리기 책임을 요구 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위기는 추락하는 우리 경제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경제회생 힘모아야

『기업인들이 규제 많고 임금높고 파업 잦은 국내에서 기업을 못꾸리겠다며 해외로 보따리 싼다는 얘기를 듣는다. 나라를 살리자는 것은 경제를 먼저 살리자는 얘기여야 한다. 경제를 못살리면 정치도 노동운동도 소용없는 일이 된다. 기업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국내에 뿌리를 내려야지, 국내에 공동을 두고 기업과 경제와 나라가 무슨 힘으로 살아남을 것인가도 생각해야 한다. 노동자―기업인―정부가 모두 흉금을 터놓고 얘기해야 한다. 경제살리기에 뜻과 힘을 모으는 일이 「진짜로」 벌어져야 한다』

―정치권에 대해서는. 국민은 정치혐오에 빠진 듯 한데.

『경제의 위기, 나라의 위기에 정치권이 국민과 더불어 걱정을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정치인이 이전투구식 싸움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신문의 행간을 읽으며 신문에 대한 애정을 키웠으나 요즘은 그런 위안도 없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다』

『신한국당의 이대표가 나를 찾아왔을 때 고통분담에 대해 말한 일이 있다. 정부는 말만 앞세웠을 뿐 지도자들 누구도 고통분담의 삶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가령 노동자가 볼 때 「우리 사주는 참으로 검소하다」고 느낄 만큼 기업인이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고통분담이다. 일본의 기업인들은 「노동자에게 먹힌다」고 표현된다. 그들의 구사호소가 먹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대표, 당신과 여당부터 시작하면 어떠냐」고 권했는데 응답을 듣지 못했다.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라면, 그런 정치를 위해 여당 국회의원부터 고급승용차를 과감하게 버려보라고 거듭 권하고 싶다. 지금 우리는 국민 모두가 제자리에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나라 살리기의 기회는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전받는 이 위기를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는 절호의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우리 사회는 무게 중심이 없어 약한 충격에도 흔들린다, 근검절약 대신에 과소비가 판치는 것도 나라의 위기를 부채질한다는 등의 지적이 있다.

○지금이 정신 차릴때

『장점 만큼 단점도 많은 것이 우리 국민이고 우리 사회다. 이기주의 만연, 황금만능주의, 과소비 풍조도 그런 단점 들이다. 신문을 보면 우리국민은 사기도 잘 친다. 못사는 이가 사기를 쳤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대 백화점 세일도 사기였다는데는 용서못할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광복 즉시 분단된 나라, 6·25로 황폐화한 국토, 좁은 땅, 많은 인구, 모자라는 부존자원, 잃어버린 정치안정, 게다가 군사독재의 시련까지, 우리가 겪어온 격동의 현대사를 돌이켜 볼 때 오늘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성취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에게는 힘이 있다. 생명력이다. 스탈린 시대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된 한인동포들의 유랑사를 읽으며 감동을 받았다. 잡초처럼 생명력이 강한 민족이 우리다. 「좀 더 형편이 기울어져야 국민이 정신 차릴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내 생각엔 오늘보다 더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지금이 바로 정신차릴 때다』

○끈질긴 지구력 절실

『우리 국민의 끈기랄까, 사회의 내구력에 대해서는 우리의 체질에 관한 엉뚱한 제안을 하고 싶다. 웃어넘겨도 좋은 일이지만 「김치를 적게 먹자」는 것이다. 김치는 우리가 세계를 석권할 수 있는 식품문화임이 분명하지만 짜고 맵다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성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극과 변화를 추구한다, 끈기가 없다, 싫증을 잘낸다는 특성과 통한다. 몇 세대에 걸쳐 우동집을 지키는 전통명가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20세까지는 모두 수재다. 일제때 일본에 유학했더니 별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우등생이 되더라. 미국에 다녀보니 유명고교에서 1등, 시에서 1등, 주에서 1등하는 한국계 학생이 수두룩했다. 문제는 20세를 지난 뒤다. 중국인 일본인은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나 우리는 아직 없다. 세계에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사람」에 한국인이 많이 나오도록 끈질긴 지구력을 더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다. 대선에 나선 정치인, 정당들에 요청하고 싶은 말은.

『LA 종교교육회의의 전례때 흑인 영가를 자주 들으면서 우리 사회의 한에 대해 생각했다. 흑인의 한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크고 깊은 것이었으나 신앙안에서 풀어지고 승화돼 영혼의 소리로 울렸다. 자기 자신이 맺혀있는 한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있어야 우리사회의 「맺힘」도 비로소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방법은 힘들고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하나뿐이다.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줄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고 난 뒤에 하는 용서가 아니라 빌기 전에 미리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다』

―지역주의에 관한 말씀을 하는가.

○지역색 극복이 관건

『올해 대선도 지역주의의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할 위험이 크다. 그렇게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소망때문에 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골이 너무 깊다. 이번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북으로 갈린 나라가 동서로 다시 찢어지는 병폐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어야 하고, 이번에 대통령을 뽑는 국민은 깊이 팬 골과 지역색을 뛰어넘어 투표할 수 있는 현명한 국민이어야 한다. 지역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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