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불같은 정념의 비극적인 가족사/“굳은 이성을 깨뜨려야 로망·서사가 나온다”아직 소녀적에, 그러니까 「김약국의 딸들」을 책으로 읽기도 전에 「TV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드라마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김약국의 집 마당가에는 원추리꽃이 적요하게 피어있고, 햇볕이 환하게 비치는 높은 마루 위에서 나비 같고 고양이 같이 천진스러운 용란이가 숯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앞머리에 고대를 넣으며 언니 용빈에게 뭐라고 종알거리는 장면이 유독 잊혀지지 않는다.
격정적이고 전율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던 그 드라마에서 왜 유독 평화롭고 한가한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을까… 어쩌면 이 작품 속에 들끓는 일상적인 광기와 야만과 비극의 함량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통영이며, 나로서는 매우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가 한치 의심이나 주저없이 주된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김약국 성수는 아버지 봉룡과 그의 재취인 어머니 숙정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인데 채 돌도 되기 전에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부정을 의심받자 비상을 먹고 자살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홀로 상사해 집까지 찾아온 사내를 살인하고 도망을 친 것이다. 숙정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도는 폐가를 가슴에 품고 피가 마르는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자라난 김약국은 딸만 다섯을 두게 된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김약국의 딸들 중에 주된 인물은 셋째인 용란이다. 그녀는 작품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태풍의 눈 같은 존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주된 인물들은 그녀에 대한 정념이나 혈연으로 인해 죽음을 맞거나 파멸하게 된다. 용란의 비극은 머슴인 한돌이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허용되지 못하고 한돌은 원한을 품고 타관으로 떠돈다. 이미 처녀의 몸이 아닌 용란은 부잣집 아들인 아편장이 연학에게로 시집을 가게 된다. 그러나 어느 해 남편 연학이 감옥에 들어간 사이 한돌이 돌아오게 된다. 보따리를 싼 용란은 한돌과 방을 얻어, 그간에 주린 정을 채우는데 번개가 번득이고 폭우가 휘몰아치는 한 밤에 감옥에서 나온 연학은 그들의 방 앞에 도끼를 들고 서 있다가 끔찍한 꿈을 꾸고 달려온 다섯 딸의 어머니인 한실댁의 머리를 도끼날로 내려친다. 작가는 그 순간을 「한실댁은 머리에서 무엇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표현했다. 연이어 연학은 한돌, 용란에게 도끼를 휘두른다. 「한쪽 어깨 위에 도끼날이 푸석 들어갔다. 연학은 춤을 추듯 팔딱팔딱 뛰면서 쓰러진 한돌이를 찍는다. 예배당 종이 울렸다…」
나에게 충격을 던진 또하나의 장면은 마음 속에 언니인 용란만을 품고 사는 남편으로부터 박대받으며 척박하게 살아가는 넷째 용옥의 방에 한밤중에 들어와 겁탈하려 한 사내이다. 「누, 누가 보나. 아, 아무도 모른다. 가만 가만…」 그는 다름아닌 용옥의 시아버지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19세기 말 남쪽 해안가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의 다스려지지 않은 야수성과 불길같은 정념에 두려움과 동시에 신비한 끌림을 느꼈다. 소설은 결국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풍부한 로망은 반통제, 반이성, 반윤리, 용암처럼 들끓는 야만성에서 솟구쳐나왔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이 시대에는 서사가 없다고들 한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태만함을 증거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카프카의 말대로 손에 도끼를 들고 굳어버린 이성의 얼음을 내려치지 않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전경린>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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