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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온고지신인가 시대의 퇴행인가(우리문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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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온고지신인가 시대의 퇴행인가(우리문화 키워드)

입력
1997.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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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힘들고 미래는 ‘안개’/‘멋진’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의·식·주부터 문화영역까지…/향수를 자극하는 따뜻함은 있지만 “그때가 좋았다”는 현실은폐일수도/그리고 우리의 창의성까지 묶는 것은 아닌지현재는 진창에 빠져있고 미래는 안개 속인데, 멋들어지게 치장한 과거가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 그 과거를 불러들이는 것은 복고라는 유령에 사로잡힌 우리 문화이다.

90년대도 중반을 넘어 21세기로 향하고 있는 지금. 과거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문화주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나곤 했던 움직임인 복고경향이, 응당 있어야 할 우리 문화의 현재의 자리와 미래에의 전망을 대체해 버리는 공룡처럼 커나가고 있다.

왜 지금 우리는 뒤를 돌아다 보는가?

복고풍은 먹거리와 입성, 치장 등 생활곳곳에서부터 문화의 각 영역, 정신의 활동 분야에까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부터. 지난 주 전국 최대의 서점인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1, 2위를 나란히 차지한 것은 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와 이승은·허헌선씨의 인형전 출품작품집 「엄마 어렸을 적엔…」. 전자는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 채 오직 딸이 일류대에 합격하기를 바라고 가족에 헌신하며 살다 안락사하는 50대 가장의 이야기, 후자는 50, 60년대 가난하던 시절의 우리네 삶의 풍경을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전국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인형전 출품작들의 컬러 화보집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권은 반가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응당 제자리를 찾고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은 그들 삶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우리 문화의 열풍」이라고까지 선전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런 모습에 자칫 『가난했던 시절이 차라리 아름다웠다, 이렇게 힘들고 못살았던 옛날을 돌이켜 보면 지금의 우리가 사는 모습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교묘한 현실 은폐 논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선이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복고의 바람은 우리의 의·식·주에서 우선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낸다.

패션에는 복고풍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지만 그것은 유행이라는 측면에서 상업논리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는 것이라 하자. 보리밥과 주먹밥, 수제비가 「별미음식」으로 자리잡은 지는 오래이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대학가와 도심에는 뽑기, 솜사탕이 유행이다. 으리으리한 원목가구가 차지했던 안방에는 대도시 지역에서는 애써 찾아도 보기 힘들었던 전통 자개장들이 다시 자리를 찾고 있다. 믹서기가 해롭다고 집안에 맷돌을 들여다놓고 쓰는 가정까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열풍, 의·식·주의 복고풍은 그래도 삭막하기만 한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일면은 있다.

60년대 이후 줄곧 「발전」을 삶의 지상목표로 해서 살아온 우리 사회. 80년대를 지배했던 소위 거대 담론은 이제 흔적도 없는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지금. 문민시대에도 간단없이 터져 나오는 부실,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부패에서 참담함을 되씹을 수 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만큼 과거를 미화하며 거기서 조금이나마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 큰 해악은 정신의 복고에 있다.

창의가 솟아나지 못하는 곳에서 복고의 기운은 또아리를 틀게 마련이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관찰되는 복고풍. 당의를 외피에 바른 치명적 알약처럼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다. 대중문화의 공장인 방송은 드라마는 물론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복고풍 경쟁이다. 추억과 감동이라는 이유로. 대중음악은 리메이크를 양산하기에 바쁘다. 신파조 연극이나 뮤지컬은 성황의 보증수표이다.

90년대 들어 한국 땅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재즈. 그것은 애당초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과거로 회귀하려는 우리 빈곤한 대중문화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재즈 아닌 재즈, 재즈 없는 재즈」.

사상도 유행의 바람을 타는 우리 사회에서 최근 가장 두드러진 스타가 되다시피 한 「시오노 나나미」와 「조선시대」.

『전통과 혁신의 관계에서 우리는 항상 초 스피드로 내달려 왔다. 마르크스주의도 한 십여년 하면 그만이고, 포스트모더니즘도 한 십여년 하면 그만이다. 아무튼 이씨 왕조는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최근의 왕조실록류의 독서 추세를 보면 지금이 조선시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문화평론가 조형준씨는 한 글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최신의 유행사조와 조선시대가 열병처럼, 포스트모던하게, 혼재해 있는 사회. 한 일본 여성작가에 의해 마치 세기말의 혼돈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영웅처럼 묘사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가 살았던 로마사가 엉뚱한 열풍을 몰고 다니는 사회.

물론 과거에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단서를 찾으려는 것은 세기말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색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틈을 뚫고 일어나는 복고의 기운에 짓눌려 우리 문화는 또 다시 발가벗기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종오 기자>

◎패션 ‘옛것이 첨단이다’/팬츠수트·모즈·로맨티시즘…/멀리 20년대,가까이 70년대까지/과거의 재해석·재배치 통한 현재와의 ‘크로스 오버’

지금 우리 문화 전반의 키워드가 복고라면, 패션에서 복고를 거론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될 지 모르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유행이 등장할 때마다 패션에서는 「과거」가 되살아났고 재논의되었다.

그러나 문화의 특정한 경향은 패션이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리드하는 것이 아닐까?

다소 과장한다면 80년대 이후 패션은 시대만 달리 선택했을 뿐, 지나간 시대의 재발견과 재해석의 발자취이다. 멀리는 20년대, 가까이는 70년대, 때로는 그 중간인 50년대를 넘나들며 과거의 정신과 스타일에서 「새것」을 건져 냈다.

90년대 들어 패션계가 가장 자주 되돌아가는 시대는 60, 70년대다. 일하는 여성상의 이미지 여파로 90년대 최고의 여성복으로 꼽히는 팬츠수트는 여성해방운동과 70년대에 풍미했던 유니섹스 모드가 그 기원이다. 올해 들어 남성복에 번지고 있는 모즈(MODS. Modern과 Kids의 합성어. 60, 70년대 유난히 옷치장에 몰두했던 영국 젊은이들을 칭함)룩도 그 시대의 산물이다. 빈약해보인다 싶게 작은 사이즈의 재킷을 입고 속에는 장식 많은 셔츠를 받치는 모즈룩은 전성기의 비틀스가 입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간결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 평범한 옷을 새로운 멋으로 보는 리얼리즘도 그렇다.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나팔바지, 골반에 걸치는 힙스터바지, 싸구려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일론저지의 알록달록한 셔츠와 바지도, 앞부터 높은 창을 댄 투박한 구두도 70년대에 거리를 누볐던 것들이다. 옷의 모양만이 아니다. 다소 촌스럽다 싶게 작년부터 시작된, 셔츠 깃을 재킷 겉으로 삐죽하게 내서 입는 방식도 그 시대로부터 차용해온 것이다.

올해 여성패션 일각에서 부각된 로맨티시즘은 20, 30년대와 닿아있다. 부드러운 원피스는 그 시대의 흘러내리듯 부드러운 스타일과 유사하다.

디자이너들이 고갈된 아이디어를 과거에서 빌려왔다 하자. 그러면 복고조의 패션이 일반에게 어필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일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유행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전파시키는 젊은층에게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을 리 없다. 그보다는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 도시와 자연, 최고와 최저 등 극단과 극단이 경계를 허물고 뒤섞이는 「크로스 오버」현상에서 연유를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패션에서의 복고는 그러나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정신과 환경에서 배태된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현재와의 연결점을 찾아내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느낌과 이미지, 형태를 따오긴 해도 천이나 디테일, 다른 옷과 매치시키는 방식은 다르다. 재발견과 재해석이며 재배치라는 표현이 맞다.

앞으로는 어떨까? 프랑스의 넬리 로디사를 비롯 국내외의 패션정보기획사들은 복고조의 사조나 흐름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계속해 패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박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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