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인들은 대개 「러시아는 이제 별 볼 일이 없는 나라」라는 느낌을 갖는다. 강대국의 관문이라고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모스크바의 세레메체보―2공항에서 받은 첫 인상은 고루하고 경직된 사고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각종 시설들과 마주치면서 거의 확신으로 변한다.어떤 방문객은 자신있게 러시아를 「우리의 70년대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우리 관광객들이 모스크바와 서울을 비교하면서 동남아시아의 한 후진국을 둘러보듯 큰소리치며 떠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올해로 정도 850년을 맞은 모스크바는 부지런히 도로와 건물을 정비하고 일부 지역에는 네온사인도 등장했지만 모든 면에서 서울에 비할 수 없다. 특히 아직도 구닥다리 기계식 전화에 머물러 있다. 국제전화 한번 걸기가 짜증스러운 곳이지만 당국은 마치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모스크바에 최근 특이할만한 일이 생겼다. 「중앙차선은 특수차량에게 양보합시다」 「모스크바시내에서 최고속도는 60㎞입니다」 등 공익광고가 거리에 등장한 것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개인 소득세 신고는 마쳤습니까」라는 문구다.
그동안 세금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 광고로 내심 잔뜩 졸아든 것 같다. 신고 불이행이나 누락, 불성실 신고에 대한 세무당국의 단속 소문이 나돌면서 외국인의 세무상담 건수도 크게 늘어났다. 유명 세무사의 시간당 상담료가 500∼600달러에 이른다니 소득세 신고를 둘러싼 사회의 긴장도를 짐작할 만하다.
주목할 것은 공익광고의 효과가 아니다. 이런 광고가 등장하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러시아가 시장경제 마인드를 바탕으로 흐트러진 국가의 틀을 재정비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모습을 이 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의 변신은 대북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는 1월말 그리고리 카라신 외무차관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북한과의 정치·경제 협력관계 복원에 발빠르게 나서고 있다. 북한의 김책제철소 및 승리화학의 재가동과 나진 선봉 청진항의 현대화를 위한 협의가 상당히 진척되고, 91년 구소련붕괴 이후 중단됐던 군사교류의 재개 움직임도 무르익고 있다. 한·소 수교이후 러시아를 휩쓸었던 한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깨지면서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러시아는 넓은 땅덩어리와 풍부한 자원, 그간의 영향력 등을 생각하면 마치 「고장난 항공모함」을 연상케 한다. 이 항공모함은 현재 재출항을 위해 시장경제 마인드로 정비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러시아」를 보지못한 채 우리보다 못하고 형편없는 나라로 속단, 경시하는 자세는 안타깝다.
이곳에 장기체류하는 상사원들은 『러시아는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단기적·피상적인 관찰만으로 보지 못했던 다른 알짜가 있다는 의미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좀더 겸허한 자세로 러시아를 관찰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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