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사회와 담 쌓은채 끼리끼리 모여 골프·낚시·여행…/외환규정한도 넘어 한국서 불법으로 돈을 빼온다는데『각박하게 살 필요 있습니까. 돈버는 것도 좋지만 잘못하면 일에만 끌려다니다가 벌어 놓은 돈을 쓰지도 못하고 죽겠더라고요. 애들 교육도 시키고 재충전한다는 기분으로 왔습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사는 정모(51)씨는 서울에서 주방용기 제조업체를 운영하다가 먼저 이민 온 친구의 권유로 사업체를 친척에게 맡기고 94년에 투자이민을 왔다. 주변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와 낚시를 즐기고 일주일에 한번씩 개인교수에게 영어를 배우는 것이 그의 일과지만 생활비 부담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의 집은 고급주택 밀집지역인 하위크가에 있고 승용차는 스웨덴제 볼보다. 이지역의 주택은 보통 대지 300평 규모로 50만 뉴질랜드달러(한화 약 3억원)이상이며 뉴질랜드 중산층 집값의 2, 3배에 이른다. 오클랜드에는 하위크가 외에도 밀포드, 미션베이, 브라운베이 등 고급주택가에서 정씨 비슷한 생활을 즐기는 교민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뉴질랜드의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오로지 쉬고 즐기기 위해 거액을 들고 온 사람들이다.
정씨는 수입원을 묻자 『현지 은행예금의 이자와 한국에서 송금해 주는 돈』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뉴질랜드의 금리는 9.8% 안팎. 100만뉴질랜드달러(약 6억원)를 은행에 예치할 경우 24%의 세금을 공제하고 연간 7만4,000여뉴질랜드달러의 이자 소득을 올릴 수 있다. 뉴질랜드 보통사람들의 연평균 생활비가 3만뉴질랜드달러 이내인 것을 감안할 때 상류생활이 가능한 액수다. 한국에서 서울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2채값에 불과한 100만뉴질랜드달러는 이들에겐 큰 돈이 아니다. 뉴질랜드인들은 이들을 「리치 코리안(Rich Kore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교민사회에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들끼리 어울려 즐긴다. 한국에서 각각 내과 소아과 치과를 개업하다 지난해 초 이민온 뒤 만난 김모(47)씨 등 3명은 일주일에 한번씩 오클랜드의 웨스트 헤이븐 정박장에서 김씨 소유의 모터보트를 타고 나가 바다낚시를 하고 매주 수요일에는 함께 술을 마신다. 지난해 11월에는 가족동반으로 캐나다를 여행했다. 치과의사인 김씨는 서울의 병원을 고용의사에게 맡겨놓고 4개월에 한번꼴로 한국에 건너가 직접 진료를 하고 수익금도 챙겨온다.
뉴질랜드의 일부 호화이민들은 한국의 외환규정 한도를 훨씬 넘는 돈을 갖고나와 이를 물쓰듯 해 다른 교민들을 놀라게 한다. 지난해 6월 외환관리법개정 전에는 투자이민 외환한도는 미화 100만달러(약 8억5천만원)였다. 또 한국에서의 소득도 2년이상 송금받을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몇몇 이민은 대도시의 건물을 사들이는 등 드러난 씀씀이만도 이를 크게 상회했고 수년간 송금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변칙적인 돈의 반입통로가 있었다는 얘기다. 오클랜드의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한 교민은 『한국의 전문브로커를 통해 이주정착비가 법정 상한에 미달하는 이민희망자를 찾아 내 사례금을 주고 상한과 차액만큼의 「불법자금」을 반입해 줄 것을 부탁하는 방법이 가장 흔히 쓰인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국의 신용카드를 현지에서 사용하고 한국에서의 소득으로 결제하는 편법도 쓰인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같은 회원국인 뉴질랜드에 대한 자본이동이 자유화할 전망이어서 호화이민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오클랜드=유성식 기자>오클랜드=유성식>
◎일자리 찾아 호주로 PTurn 확산/제조·서비스업 미약/노무직도 바늘구멍/할수없이 ‘옆나라로’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진 교민들이 일자리를 찾기위해 호주로 떠나는 이른바 「피턴(P-Turn)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뉴질랜드 교민들이 현지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호주행을 결심하는 것은 좀체로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어려워서이다. 뉴질랜드는 인구가 350만명 밖에 되지않아 내수시장이 워낙 좁은 데다 목축업 등 1차산업과 첨단전자산업을 빼고는 다른 제조업이나 서비스산업이 극히 미약하다.
따라서 내수시장이 비교적 넓고 2차산업과 서비스·유통업이 발달한 호주가 보다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뉴질랜드 현지인조차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매년 수만명씩 호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뉴질랜드 대사관 오동일 영사는 『영어에 익숙지 않은 교민들은 사무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하기 어렵고 시장이 좁아 청소나 용역 등 노무직 일자리도 거의 없다』며 『95년말부터 직장을 구하기 위해 영주권을 얻어 호주로 들어가는 교민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교민들이 호주로 쉽게 옮겨갈 수 있는 것은 호주의 특수한 이민법 때문. 뉴질랜드 시민권자에 대해서는 본인이 신청할 경우 공항에서 바로 영주권을 발부해 준다. 인구가 적어 노동력이 부족한 호주로서는 뉴질랜드에서 양질의 노동인구를 들여와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호주는 이중국적이 가능한 나라여서 많은 뉴질랜드인들이 호주영주권을 갖고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뉴질랜드에 이민온 지 5년째인 김모(34·노동)씨는 최근 호주행을 결심했다. 이삿짐 운반, 청소, 막노동 등 여러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그나마도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일자리가 아니었다. 얼마전 호주 시드니에서 한국음식점을 하고있는 친구가 호주행을 권했다. 『같은 노동일을 했지만 그 친구는 돈을 모아 조그만 한국식당을 차릴 수 있었는데 저는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어요』
오클랜드 한인회장 서정수씨는 『호주로의 재이민은 아직 초기단계에 불과하지만 이곳 경제사정이 크게 호전될 기미가 없어 앞으로도 피턴 현상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라고 말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아시아 비전’사 이지연씨/뉴스제작·앵커·기자 3역/소신껏 뉴스 만들고 싶어 국영방송 사직후 회사 설립/일요일 아침 국영TV 통해 아시아계 이민뉴스 공급
뉴질랜드 오클랜드시의 이지연(33)씨는 교민들이 자랑하는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다.
현지인들에게는 「멜리사 리」로 유명한 그는 국영방송 TV-NZ가 채널 1번으로 일요일 아침에 내보내는 아시아계 이민사회 소식인 「아시아 다이나믹」을 제작, 공급하고 진행도 맡고 있다. 사안에 따라 직접 현장보도도 한다. 뉴스제작자·앵커우먼·기자의 3역을 동시에 해내는 맹렬여성이다.
원래 이 뉴스프로그램의 앵커였던 그는 『내 뜻대로 뉴스를 만들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95년 사표를 내고 기자 6명을 채용해 뉴스제작회사 「아시아 비전」을 설립했다. 이어 『이 프로는 아시아계가 만들어야 한다』고 방송사 간부들을 설득해 공급권을 따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아시아계 이민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계 이민 뉴스를 진행하면서 백인중심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이 겪게되는 고충과 애환이 있음을 알게 됐어요』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인 76년 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말레이시아로 이주했고 호주 멜버른대에서 언론홍보학을 전공한 뒤 88년 다시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왔다. 89년 오클랜드의 주간 선데이 뉴스에 입사해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당시 선데이 뉴스의 유일한 아시아계 여성으로 일이 험하기로 소문난 경찰기자 생활을 5년간 해냈다.
이런 경력 덕분에 그는 95년 TV-NZ 입사후 바로 앵커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다. 스스로를 「현장 체질」이라고 말하는 그는 『뉴스제작일이 바빠 좀처럼 사건 현장에 나가지 못하고 제약된 방송시간 때문에 알리고 싶은 내용을 모두 보도할 수 없는 것이 늘 아쉽다』고 털어 놓았다.
『뉴질랜드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 한인들도 능력발휘의 기회는 많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이 경쟁도 치열하고 인종 차별도 남아 있어 적응이 어려운 것 같아요. 남동생도 직장에서 현지인들과 갈등이 적지 않았어요』
그는 95년 컴퓨터 시스템 통합사업을 하는 뉴질랜드인 남편과 결혼했다. 몇차례 서울에 나와 맞선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맞는 한국남자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한인 청소년 선도활동을 위해 지난해 결성된 「청소년 활동 진흥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모습도 잊지 않고 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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