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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총리 5명 기용… 실무·개혁형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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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총리 5명 기용… 실무·개혁형 되풀이

입력
1997.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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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재임 9개월 ‘역대 최단’/이회창 총리 이후 취임인사 3명 대선주자 ‘이채’93년 2월25일 출범한 문민정부는 지금까지 5명의 총리를 기용했다. 평균재임기간은 9개월여. 역대정권중 총리재임기간이 가장 짧다. 문민정부 총리의 특징은 실무형과 개혁형이 되풀이 됐다는 점. 이회창 총리이후에 취임한 총리 대부분이 대권후보 반열에 들어가 있어 이채롭다.

◇황인성 총리(93.2.25∼93.12.16)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권 초대총리로 군 관 정 재계를 두루 거친 당시 민자당의원(전북 진안 무주 장수)이었던 황인성씨를 발탁했다. 황총리는 취임초부터 개혁과 사정의 세찬바람에 휩싸였으나 성격은 실무형이었다. 그러나 황총리 재임기간은 사건 사고로 얼룩졌다. 취임하자 마자 93년 3월에 구포열차사고가, 4월에는 슬롯머신사건등이 연달아 터졌다. 개혁이 청와대에서 주도됐기 때문에 황총리는 「고개숙인 총리」였다. 황총리 자신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부총리론」을 주장했다. 황총리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쌀개방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회창 총리(93.12.17∼94.4.22)

이회창 총리는 감사원장 시절에 성역없는 감사로 구축한 「개혁」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총리는 등장때부터 개혁의 수식어가 따르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이총리는 『법에 따라 각료에 대한 임명제청권을 행사하겠다』고 「실세총리」를 자임했다. 이총리는 개혁총리답게 관변단체에 대한 정부지원을 중단하라는 등의 파격적인 지시를 내려 파장을 일으켰다. 이총리도 94년 1월 낙동강수질오염사고와 같은해 4월 쌀문제로 우루과이라운드 최종이행계획서를 수정제출하는 과정에서 사과담화를 발표해야 했다. 이총리는 94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사전 보고를 지시해 청와대의 분노를 샀다. 사표제출 1시간만에 「문책」으로 경질됐다.

◇이영덕 총리(94.4.23∼94.12.17)

이총리의 취임일성은 「화합총리」였다. 전임총리에 비교돼 야당으로부터 「있는 듯 없는 듯」하다거나 「용각산총리」라는 비판을 들었다. 총리실은 작전통제부(청와대)가 아닌 지원사령부였다.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지만 반려됐다. 이총리는 같은해 12월 대통령 취임 2주년에 즈음해 정국 쇄신차원에서 교체됐다.

◇이홍구 총리(94.12.18∼95.12.15)

이총리의 취임일성은 세계화였다. 영국신사 이총리의 취임에 대해 여당은 「무난하다」고, 야당은 「보수회귀」라는 논평을 냈다.

이총리 자신은 대통령이 모든 일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보좌하고 직접챙기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는 것이 총리의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이총리는 정부조직개편을 완료했고 95년 6월 한국통신파업에 따른 공권력의 명동성당 및 조계사진입 등의 풍파를 겪었다. 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의 비자금 폭로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된 뒤 시국수습차원에서 교체됐다.

◇이수성 총리(95.12.16∼)

역사바로잡기의 개혁지속을 위해 「비판적 지식인」 이수성 서울대 총장이 발탁됐다. 이총리는 1년 2개월동안 총리직을 맡아 현정부의 최장수총리로 기록되게 됐다. 재임시 가장 큰 시련은 노동법파문과 한보사태. 이총리는 내각장악력을 바탕으로 한 실무능력을 인정받았고 급기야는 여권의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이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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