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의학사가는 「삼국유사」 제3권 「아도,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에 나오는 여질과 악병을 나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의학에서 여질은 나병 외에 장티푸스를 뜻하기도 하며, 폭넓게 전염성 열병 또는 전염병 일반을 가리키기도 해 그것이 정말 나병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유사의 해당구절은 『척발도는 매우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여질에 걸렸으며,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악병에 걸렸다』로 돼 있어 나병의 직접적인 증거는 되기 어렵다.앞 뒤 문맥과 묘사로 봐 나병이 틀림없으리라고 여겨지는 기술은 고려시대부터 빈번히 나오기 시작한다. 고려 중기의 의학서적 「향약구급방」에 나오는 악창, 「고려사」의 악질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세종실록」부터는 나병과 나질, 「향약집성방」에는 대풍라, 「동의보감」에는 대풍창이라는 병명이 등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우리나라 나병의 역사는 1,000년 가량을 헤아리는 셈이다.
시대에 따라 나병과 나환자에 대한 인식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나환자가 얼마나 소외되고 스스로도 자신의 병을 불가항력의 천형으로 여겼는지는 나환자 시인인 한하운의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잘릴 때까지 천릿길 전라도길>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황상익>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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