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든 신참의 열정이란 자못 가관일 경우가 잦은 법. 30대초에 교수가 된 나도 강의를 위해서라면 허파라도 뒤집어 보일 지경으로 열정적이었다. 3시간 연강이 많았는데, 강의가 끝나면 나는 늘 혼곤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당시의 일기 한 쪽을 들여다보면 그 열정의 극한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강의의 경험에서 얻은 한가지, 열강하는 중에도 시선과 호흡이 고르게 된 지경에는 몸의 단련을 통해서 얻은 바가 적지 않다. 쉽게 말하자면, 무게 중심이 낮아진 것이다. 발바닥으로 숨쉬면서 강의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귀신들이 유리창가에 몰려들어 청강이라도 하게 될까』
특히 졸업생들과 입학생들이 교차하는 이맘때가 되면, 교수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성찰하며, 학생이 죽어버린 이 시대에 선생으로 입신하려는 열정을 가만히 되씹어본다. 살아가는 뜻은 무엇일까? 그 무익한 열정은 무엇일까?
내 경우 선생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우선 「나」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알아낸 것을 전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앎을 위해서, 그리고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먼저 노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와중에서 넘어졌든 자빠졌든, 다만 그 노력의 치열한 흔적, 그 흔적의 길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산정에 올라서서 두 다리를 뻗고 산 아래를 향해 두 손을 흔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산정을 향해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이다. 그 실수의 경험을 헛되이 하지않은 사람이며, 그 경험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를 닦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은 강단 위에서 강단 아래로 정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답이 없는 절망 속을, 해결이 없는 배회속을 얼마나 멋지게 견딜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잘해야 그는 정답을 찾기위한 도정에서 얻은 상흔을 보여줄 뿐이며, 심지어 오답 투성이의 앎과 삶에서도 섣부른 권태나 냉소에 빠지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용기있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가르칠 「무엇」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르칠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 허위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좋은 선생이란 허위적대면서도 격이 있고 자빠지면서도 멋이 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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