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왜곡·몰락/북 전쟁도발 가능성/통일주체는 남한 망명으로 공개 인정황장엽 망명은 일차적으로 북한의 모순을 극적으로 표현한 사건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 당국은 그를 「변절자」로 처리하고 있고 대부분의 한국 보통사람은 주체사상의 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황장엽 망명의 엄밀한 사실 확인은 그의 한국 도착이 실현되면 좀더 선명해질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망명이 현실적으로 제기하는 몇가지 메시지를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민족문제이다. 원래 황장엽의 주체사상은 구한말의 역사적 경험과 해방후 김일성정권의 현실적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외세에 의한 분단, 그리고 점령을 극복하려는 민족의식의 발로란 점에서는 주체사상을 전투적 민족주의로 보는 시각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김일성 체제 이데올로기로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무리와 왜곡과 자기 모순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인류 최대의 인간중심 사상이라든가 수령론으로 알려진 김일성 개인숭배의 조직론으로 전락한 것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황장엽 자신은 주체사상의 건축은 물론, 그 왜곡과정에도 전면에서 활약했던 이데올로그였다. 이제 그의 망명은 주체사상이 민족문제 해결의 철학과는 거리가 멀고 부정한 권력과 야합했다는 것을 웅변으로 입증해 준 것이다.
둘째, 평화문제이다. 황장엽은 북한 지도부나 북한 인민으로부터 존경받았던 사상의 권위였지 적나라한 권력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북한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반지성적 북한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적격의 인물이다. 황장엽은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의 비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는 그의 망명이 엄청난 충격이지만 김정일의 이른바 「붉은 기 사상」의 추진을 위해서는 그의 존재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갈테면 가라』고 하면서 망명의 현실을 비교적 빨리 받아들인 것은 그들 나름의 손익계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황장엽은 망명직전 일본을 떠나면서 쏟아지는 질문공세에 「평화」라는 한마디 말을 남겼다. 그는 최근 평화문제, 특히 세계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또다시 동족이 전쟁을 하면 우리 민족은 멸망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김정일체제에 절망하고 있고 그 절망의 극한상황에서 전쟁의 가능성마저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북한의 전쟁의지와 능력을 과소평가 하지말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가 망명 결심후 남한의 군사력 강화를 주문한 것은 북한 정권에 대한 절망에서 나온 것이며 북한의 파국과 전쟁 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보인다.
셋째 통일문제이다. 민족과 통일을 그렇게도 앞세우는 북한, 그 선전 선동을 정당화하고 이론화했던 황장엽의 한국 망명은 사실상 통일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이니셔티브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통일정책에서 과감한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통일정책의 핵심은 통일방안의 연구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추진해야할 통일정책의 2대 과제는 전쟁방지와 통일준비이다.
다행히 한반도를 둘러싼 객관적 여건은 전쟁방지에 도움이 된다. 미군의 억지력이 있고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내부의 사정은 좀 다르다. 한국내의 국론분열, 한보사태로 인한 무정부적 정국, 취약한 안보상황, 군·경의 사기저하 등은 불길한 징조이다. 거기다 북한 지도부 내에 분열이 생기고 인민이 눈을 뜨기 시작하면 파국은 걷잡을 수 없이 전쟁을 유혹할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 파국이나 전쟁 등 어떠한 이변에도 견딜 수 있는 국력을 배양해야 하고 그 국력을 바탕으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통일에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세계가 국경이 없는 시대로 달리고 있어도 우리는 민족국가의 중심을 잡고 튼튼한 국방력으로 전쟁을 저지하면서 통일을 주도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 두 과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지도세력을 창출해야 한다. 대선도 이러한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을 가진 지도자의 선택으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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