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글을 쓰는 일이다보니 책에 대해 조금은 남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얼마전 아이와 함께 대관령을 걸어 넘을 때 아이가 아빠는 글쓸 때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물어 『아빠는 이 세상의 푸른 나무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글을 쓸 때 나무를 생각하는 건 과연 내가 지금 쓰는 이 글이 저 푸른 나무들을 베어내 책으로 만들어도 부끄럽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읽을 사람들이거나 자신에게보다 먼저 내가 쓴 글을 위하여 몸을 바칠 나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작가들의 마음일지 모른다.
지난해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사과박스 채 어느 대기업의 창고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을 때에도 놀랐지만, 이번에 한보 부정대출 비리로 세간이 떠들썩하던 중에 현철씨의 자서전이 한보 창고에서 사과박스에 포장된 채로 1만권이나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한번 그렇게 놀랐다.
『돈도 아닌 책인데 뭐』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이 1만부 팔려나가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 같은 소인배들은 「당신의 책 한 권을 사서 누구에게 선물을 했다」는 말만 들어도 두고두고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한보의 정태수씨 일가는 혹여 뒤따를지도 모를 구설수가 두려워 직원들에게 조차 나누어주지 못할 현철씨의 자서전을 대체 무엇 때문에 1만권이나 사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을까. 다만 이심전심으로 짐작만 할 뿐 우리가 거기에 대해 섣불리 『그건 이런 뜻에서일 것이다』하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책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라면 분명한 건 현철씨도, 그리고 그것을 1만부나 구입해 창고에 쌓아둔 한보의 정씨도 이 세상의 푸른 나무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이다.
나무는 그런 책에 자신의 푸른 몸을 바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하나하나 제대로 따지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 어디 그것 하나뿐일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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