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붓자국에 배인 노선비의 서릿발 기개우리 역사에는 오래 전부터 자화상이 드물지 않게 그려져 왔다. 첫 사례로는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 공민왕이 자화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초 김시습이 그린 작품도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이 유교체제를 갖추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림 잘 그리는 사대부가 왕실의 초상화 제작 때 불려나가 직접 그리게 하거나 감독을 맡겨도 거부하는 사례가 적잖았다.
그러나 특출난 예술적 기예를 어떻게 억제할 수 있을까? 이른바 영·정조 문예부흥기의 한 주역인 강세황(1713·숙종 39∼1791·정조 15)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시짓기와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등 3절에 감식안까지 갖추었다 하여 4절이라는 말도 있다. 이 문예계의 거인은 「마약 같은 그림그리기」를 끊으려 무진 애썼지만 무려(?) 3점의 자화상과,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자신이 등장하는 그림 여러 점을 남겼다.
그가 35세 때 그린 「현정승집」은 초복을 맞아 개를 잡아 친구들과 먹으면서 시를 읊고 거문고를 뜯는 풍류를 그린 장면화다. 등장인물의 얼굴이 작아 그 특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또 45세 때 개성을 여행하고 남긴 여러 그림 중 「태종대」에서는 넓직한 바위에 갓쓰고 앉아 그림 그리는 사람이 강세황 자신이다. 이 그림들은 어두움과 그림자를 그려넣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서양화법 수용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런 그가 51세 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이 결심은 3년도 못가 깨지고 만다. 54세 때인 1766년 가을 그때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자서전에 2점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 중 하나에는 『이 늙은이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느 정도는 그 정신만을 잡아서 세속화가들 것과 전혀 달랐다』라고 써 자신이 그렸음을 밝히기까지 했다.
그가 70세에 그린 자화상은 한번 손길로 마감해야 하는 우리 그림의 방법에 비추어 도저히 일흔살 노인이 그렸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꼿꼿한 붓자국이 놀랍다. 그림 위에 적은 내용.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은 흰데, 머리에 관모를 쓰고 몸에는 야인의 옷을 걸쳤다. 이로써 마음은 산림에 있으되 이름은 조정에 있음을 보이도다. 가슴에 수천 책을 숨기고 붓 힘은 온 세상을 흔들지만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나홀로 즐길 뿐이다. 옹 나이 70이오, 옹의 호는 노죽이다. 이 초상은 스스로 그리고 이 글도 스스로 짓는다. 때는 임인년』 적힌대로 그는 만년에 벼슬살이를 시작, 77세에 오늘날의 서울시장이 된다.
그에 대한 이 칭송은 합당하리라. 『여기에 아직 건너오지 않은 근대가/ 이미 시작하고 있다/ 어디 음영뿐이리/ 이전의 것이 아니다/ 이후의 것의 시작이었다/ 배타적인 채색 따위도/ 이미 문을 열어/ 근대의 자아가 시작되었다』(고은의 시 「강세황」 중에서)<최석태 미술평론가>최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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