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 창조’ 멀고 험한 길○끊임없이 표적수사 시비 시달려
▷사정◁
문민정부 4년은 사정의 연속이었다. 개혁이 곧 사정과 동의어로 인식됐다. 부정부패 척결은 경제회생과 국가기강 확립의 최우선 전제조건이었다. 공직자 재산공개, 공무원 부패척결, 정치권 비리타파 등 국정전반이 사정의 된서리를 만났다. 성역없는 사정은 그 엄정성에도 불구하고 표적사정, 목적수사 시비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사정의 회오리에 맥없이 꺾였던 5·6공 인사들이 남긴 격화소양, 토사구팽 등이 이를 빗댄 말이다. 사정한파에 납작 엎드린 공직사회의 복지부동과 무사안일도 사정이 남긴 후유증중 하나이다.
김대통령은 취임직후 가장 먼저 군개혁에 착수했다. 과거 권력창출○정치단절·사조직 척결 높은 점수
▷군개혁◁
의 산실이었던 군부를 정치와 단절 시키고자 하는 군개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숙군에 가까운 조치였다. 하나회가 해체됐고 기무사의 위상도 크게 낮아졌다. 인사에서의 뇌물수수 관행과 율곡사업 등 각종 군 비리척결작업이 줄을 이었다. 이로인해 군을 정치와 완전 분리한 것은 문민정부의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확산, 군의 사기저하는 후유증으로 남아 전력약화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받고있다. 사조직 척결도 PK인사 중용시비로 빛이 바랬다.
○원칙부재로 임기응변대응 일관
▷대북정책◁
김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장기전망 부재와 지나친 임기응변식 대응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북한이 복잡한 상대임에도 대부분의 남북관계는 국내정치와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의 송환,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직전에 이뤄진 대북 쌀지원은 장기적 안목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김대통령의 취임사중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언급은 오늘의 현실에서 살펴보면 상당한 편차가 있다. 문민정부가 대북 강온의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초기 성과불구 부정부패상 여전
▷정치개혁◁
문민정부의 출범일성은 한국병 치유와 신한국 창조였다. 공직자 재산공개, 정치자금법·선거법·정당법 개정 등 일련의 정치개혁 조치가 줄을 이었고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개혁 성과에 대한 회의가 제기됐고, 개혁입법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았다. 통합선거법아래 치러진 4·11총선에서는 금권선거의 폐해가 여전히 드러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후 단 한푼의 돈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했으나 한보사태는 가신정치 및 측근정치의 폐해와 정치권과 권력층에 온존해 있는 부정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현실무시로 경제파탄 주범 비판
▷실명제◁
「개혁중의 개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부정부패의 온상인 지하경제를 없애기 위한 취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실명제는 명분만 남아있고 경제파탄을 가져온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실명제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경제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게 지배적인 견해이다. 금융실명제는 부유층의 탈세와 검은 돈의 거래수단인 가명·차명·도명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부동산실명제는 부동산 투기수단으로 악용돼온 명의신탁에 의한 부동산거래를 금지시켰다. 실명제에 아랑곳하지않고 지하경제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한보사태에서 보듯 고위공직자 정치인 기업인들의 검은 유착관계는 여전히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선례 남겨
▷과거청산◁
김대통령은 성공한 쿠데타도 사법적처리의 대상이 된다는 선례를 남기며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잡고자 했다. 문민정부의 단호한 과거청산 의지에 따라 3명의 전직대통령이 법정에 섰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은 죄인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5·6공과의 단절은 일정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미완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권위주의 체제청산은 또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으며, 국민과 함께 하지않는 개혁은 완전성취가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5·6공 청산은 권력과 재벌간 먹이사슬 고리의 단절계기를 마련하는 부수적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노동법개정안 날치기 저항불러
▷노사·교육개혁◁
김대통령은 지난 해 4월 「신노사관계구상」을 발표하면서 의욕적으로 노사관계 개혁작업에 나섰다. 5월 대통령 자문기구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설치, 노사관계개혁의 근간인 노동관계법 개정시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노사관계 개혁작업은 지난 해 12월 개정안이 국회에서 날치기처리되면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켜 손상을 입었다. 노사관계 개혁에 따른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등으로 노사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맞게됐다. 김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 교육부문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출범직후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를 설치했고 95년 5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열린교육사회, 평생학습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5·31교육개혁 조치」는 3차에 걸쳐 모두 102개의 개혁과제를 제시했다.<이충재·홍희곤·정희경 기자>이충재·홍희곤·정희경>
□나는 이렇게 평가한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4년전 기대와 희망이 허탈과 분노로
4년전 군부권위주의를 마감하고 민간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들떠 있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 기대는 허탈과 분노로 바뀌었다. 대선에서의 지지여부를 떠나 국민 모두 민간정부의 개혁정책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이유는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너무도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김영삼정부의 역사적 과제는, 첫째 군부권위주의 유산의 청산, 둘째 민주적 경쟁의 규칙을 확립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의 구축과 구조화한 부패의 청산, 셋째 비대해진 재벌의 규제와 중소기업육성 및 노동문제의 수용을 통한 경제개혁 단행, 넷째 부의 지역간 편중과 엘리트충원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는 균형정책, 다섯째 남북한 평화구조의 정착과 통일기반 조성 등이었다.
물론 김영삼정부가 임기내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에서의 개혁이 어우러질 때, 민주화는 일시적으로는 성장을 둔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체제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참여를 통한 성장과 복지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김영삼정부의 군부개혁을 통한 군의 병영복귀와 민간통치원칙의 구축은 평가할만한 업적이었다. 초기 사정개혁 역시 민주화에 기여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핵심분야에서 개혁정책은 실패를 거듭했다. 재벌에 대한 특혜와 정경유착 고리는 심화했고 대통령의 권력행사는 권위주의시절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제약되지 않았다. 날치기처리와 법의 편파적 적용에서 보듯 민주적 경쟁의 틀과 제도는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노동자와 봉급생활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노동통제와 경제운영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탈냉전하에서 남북한 힘의 관계가 남한의 압도적 우위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대북정책 역시 강경일변도이거나 우왕좌왕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정부는 구체제 과두세력을 해체한 자리에 PK로 대변되는 새로운 엘리트카르텔을 대체, 지역문제를 해결은 커녕 악화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김영삼정부의 실책은 민주적 법의 지배원칙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다. 법의 지배에 대한 부정과 무시는 민간정부 자신이 과거 권위주의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개혁실패의 근본 이유는 대통령과 민간정부가 개혁의 철학과 원칙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많은 단기적 처방과 임기응변적 대응, 법과 제도의 편파적 적용, 일관성의 부재, 즉흥적 국정운용 스타일은 쏟아지는 개혁정책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별로 개혁된 것이 없는 현상을 노정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재벌규제정책, 그리고 정치관계 개혁법률이나 안기부법개정과 같은 중요한 개혁조치들은 제대로 실천되지 않거나 역전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러한 역전이 대통령과 정부자신이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개혁이 많은 오류를 남기고 실패했더라도 민주주의의 귀중한 실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는 특정 정권의 임기내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내심을 갖고 추구해야 하며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실패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박관용 국회 통일외무위원장/개혁 토대마련은 민주화 중대한 성과
문민정부가 출범한지 벌써 4년이 됐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불황을 극복하기위해 사회 각계가 힘을 모아야 하고, 국가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노동법 파문과 한보사태의 충격으로 방향타를 잃어버린 난파선처럼 혼돈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으로 밝아오는 민족의 여명에서 도도한 정의의 역사를 절감하며, 그 역사적 대열에 동참하고자 정부에 헌신해온 한사람으로서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군부권위주의 체제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첨예한 갈등을 양산해 왔다. 이러한 갈등들을 해소하려는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사회운동이 민주화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돼왔다. 문민정부는 바로 그러한 민주화 세력이 앞장서서 군부권위주의가 남겨놓은 유습들을 청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공고화 해야하는 당면과제를 부여받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개혁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시작된 반부패 사정개혁은 다소 제한적 이었지만 국가부문과 정치사회 영역에서 안일, 무능력, 부패, 비리 등 권위주의 잔재를 현저하게 척결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개혁을 통해서 실제 바뀐 것이 없으며 혼란만 느낀다는 사람이 적지않다. 즉 개혁을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도 개혁을 피부로 실감하는 사람이 적은 이른바 「개혁의 역설」이 논의되고 있다.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온 개혁이 오히려 민심이반현상을 낳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냉철하게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진행돼온 대부분의 구조개혁들이 국민들의 기대만큼이나 그 결실이 단시일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오랜 권위주의에서 탈피하여 정부와 국민이 함께 「개방과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그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간과돼서는 안될 중대한 민주화의 성과이다.
정부는 지난 4년동안 공직자 재산공개, 통합선거법 제정,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부정부패척결 등 제도적 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해왔다. 그에따라 과거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인권보장, 언론자유, 군의 중립, 관권의 선거개입 금지 등 유무형의 성과가 점차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5·18특별법 제정이면에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을 하지만 이것은 문민정부라는 현정권의 특성과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력이 아니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은 바로 이와같은 소란스러움 속에서 참여와 정의, 그리고 다양성의 활력이 넘치는 민주사회를 점진적으로 이뤄나가는 민주화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현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해도 냉철히 판단하고 국민모두가 한 마음으로 혼돈의 에너지를 승화시켜 나간다면 위기를 하루아침에 민족중흥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진정한 개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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