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만철씨 일가/“애들 학교 잘다니고 집도 직장도 있어 이곳생활 즐거워요”『항상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어렵게 사는 국민들도 많은데 제가 너무 과분한 혜택을 입고 있는 것같아 송구스러워요』
94년 3월18일 새벽 부인과 2남1녀 등 온가족을 이끌고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같은해 4월 귀순한 여만철(52)씨. 서울 노원구 자택에서 취재팀을 만나 연신 『이곳 생활이 즐겁다』고 말하는 그에게서는 일말의 불만도 찾아 보기 어려웠다.
『애들이 모두 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번듯한 내집도 있어요. 은행예금 이자도 다달이 불어나 수십만원이 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넘어 온 것도 아닌데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어요』
그가 살고있는 25평짜리 아파트는 분양을 받아 각계의 도움으로 대금을 치르고 95년 7월 입주한 본인 소유다. 맏딸 금주(24)씨는 중앙대 유아교육과 3학년이고 장남 금용(22)씨는 연세대 전자기계공학과에 합격, 봄이면 대학생이 된다. 차남 은용(20)씨는 광운전자공고 2학년. 말투도 다르고 나이차이도 많았지만 주위의 학생들이 잘 대해 줘 적응이 쉬웠다.
여씨는 현재 서울 모병원의 총무과 소속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다. 병원의 처방전과 진료기록부 등을 인쇄한다. 월급은 120만원 안팎으로 성인인 3자녀의 앞날까지 염두에 두면 빠듯하다. 그래서 부인인 이옥금(49)씨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낮에는 시장에 나가 남의 가게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이 정도도 일을 안하고 어떻게 밥을 먹고 살겠어요. 그래도 수입을 쪼개 저축도 합니다. 95년 취직을 한 뒤 처음 1년간은 강연에 불려 다니느라 거의 출근하지 못했는데도 병원측이 양해해 줘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동료들과도 친해진 만큼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힘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이런 「만족감」 덕분일까. 돋보기 없이는 신문을 읽을 수 없었던 그는 서울 생활 3년만에 돋보기를 놓았고 체중도 늘었다. 이웃 주민들도 큰 위안이다. 수시로 찾아 와 말동무가 돼 주고 안부를 묻는다. 『귀순자들이 가장 많이 불만을 토하는 「남한 사람들의 이기심」도 꼭 나쁘게만 볼 수는 없어요. 자본주의 경쟁체제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그런 것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먼저 마음을 열었더니 모두들 마음을 열더라고요』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은 삼가고 있다. 지나치게 신분을 드러내면 북한의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는 『95년 딸에게 「민족해방 인민전선 지하당 5지구 사령부」명의의 협박편지가 날아 든 적이 있다』면서 『특히 요즘같은 분위기라면 25년간 북한에서 안전원(경찰) 생활을 한 나도 표적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금주씨도 불안을 이유로 취재팀의 인터뷰 요청을 끝내 거절했다.
『당국의 신변보호 기간이 끝난 지난해 6월 이후로는 솔직히 겁날 때가 많습니다. 직장동료들과의 술자리를 되도록 피하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가 겁나 승용차를 샀어요. 지방에 갈 때면 새벽 1시 이후에 차를 몰고 나갑니다』
여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있는 동안 경관 2명이 시간마다 들러 집안팎을 둘러 보았다. 이한영씨 피격사건의 여파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였지만 순찰경관과 다과를 함께 하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유성식 기자>유성식>
◎벌목공 한창권씨/취업 3일만에 실업자로/“당국 직업알선 무성의에 과거 신분따라 차별까지”
92년 12월 러시아 틴타지구 벌목장을 탈출해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94년 8월 귀순한 한창권(37)씨는 직장생활 경험이라고는 3일이 전부다.
그는 탈출 당시에는 벌목공이었지만 함흥의전과 함흥의대 특별학부를 졸업한 한의사 자격증 소지자. 그런 경력이 있어서 95년 개인 한방병원에 관리직원으로 들어 갔다가 『이틀간 강연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원장이 싫은 소리를 해서』 바로 그만두었다. 그후 그는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못한 채 실업자생활을 이어왔다. 자신의 18평짜리 영구임대 아파트를 찾아오는 몸이 불편한 이웃 주민들을 돌봐 주고 인사치레 푼돈을 받아 생계를 잇고 있다. 『같이 일하자는 한방병원이나 한약방은 많지만 잔심부름이나 시킬 게 뻔해 거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북한의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아무일이나 해도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아무일이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함흥에 부인과 아들을 남겨둔 채 혼자 귀순한 그는 당국의 「무관심」이 특히 불만스럽다. 『도대체 직업알선에 성의가 없어요. 개인의 적성과 희망은 무시하고 그저 연줄이 닿는 직장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뒤는 각자의 책임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면서도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귀순자들에게는 억대의 정착금과 안정된 직장을 제공하는 차별대우를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북한을 저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 아닙니까』
「이곳 사람들」과의 단절감도 그를 괴롭힌다. 『남한 사람들은 이기주의가 몸에 뱄어요. 자신의 이익에 맞지않으면 상대하지도 않고 때로는 사람을 이용해 먹어요. 심지어 한의학 서적을 출간해 주겠다고 산삼 두 뿌리를 받아간 뒤 감감 무소식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사님이 귀순자들에게 전달하라고 준 돈을 중간에서 가로 챈 사람도 있었어요.』
그는 요즘 한의학 서적을 뒤적이며 한의대 편입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쪼들리는 살림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사회적으로 대접도 받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확신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고 생활의 낙도 없다』며 한숨이 길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이순옥씨 모자/“자유는 찾았지만 외로움·생활고 심해”/아들 공사판 품삯 관리비 등 내면 쌀값만 남아
95년 12월 아들과 함께 귀순, 서울생활 2년째를 맞은 이순옥(50·여)씨는 하루하루가 힘겹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은 대신 외로움과 생활고가 목을 죄어 든다.
귀순 당시 임대아파트와 정착금 800만원을 받았지만 가전제품과 가구 등을 사고나니 한푼도 남는 것이 없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도 없고 도움을 주는 독지가도 없다.
7년동안 북한 수용소에서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온몸이 성한 데가 없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무엇보다 원망스럽다. 아들 최동철(30)씨가 공사판에서 품삯을 벌고 더러 강연회에 나가 강연료도 받아 오지만 아파트 임대료와 관리비 30만원을 내고 나면 적빈의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겹다. 『쌀만 사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달에 2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그저 목숨만 이어가고 있어요』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이들 모자를 괴롭힌다. 찾아오는 이웃이나 친구가 없어 하루종일 집안에서 외로움과 싸우노라면 이씨는 어느덧 북한의 남편과 부모형제 생각이 나 눈물이 솟는다. 『우리 모자는 이렇게라도 살아있지만 남편은 생사도 알 수 없으니…』
이씨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이웃의 냉담한 태도다. 귀순 당시의 환영분위기와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무관심해지더니 지금은 연락하는 사람도 없다. 주위에서는 무식하다고 깔보거나 거지보듯 피해 비참함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젊은 이웃집 여자들이 「이것도 사람사는 집이냐」며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해 이제는 마주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판단하는 세태가 안타까워요. 가난하긴 했지만 북에서는 그래도 이웃과 친지간에 인정이 넘쳤어요』
그나마 남한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는 아들의 모습이 이씨에게는 유일한 위안이다. 올해 한양대 전자공학과에 합격해 만학의 꿈을 이룬 아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하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한다는 것이 쉽겠어요? 동철이가 학교 다니는 동안이라도 도와 줄 후견인이 나타난다면…』
이씨는 한숨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직접적인 경제적 도움을 바랄 수야 없지요. 그렇지만 정부가 나서서 귀순자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알선해 줬으면 해요. 아들이 나중에 좋은 여자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기만을 빌고 있어요』<배성규 기자>배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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