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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자화상 기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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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자화상 기행:7)

입력
1997.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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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미지에 담긴 따뜻한 미래에의 희망프로이트는 사는 내내 오스트리아에서는 좀 이상한 글을 쓰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옹호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읽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수도 빈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거리를 지나노라면 예닐곱 집마다 「피부병, 성병 전문의」라는 간판이 보였다. 전염의 불안에다 오늘날의 세계가 전혀 모르는 그 당시의 치료는 역겹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 가해졌다. 그 결과 이빨이 빠지고 갖가지 장애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진단이 내려지면 권총을 잡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세기 전환기의 빈은 당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대도시였으나 급속히 좁아지는 제국의 영역, 더딘 사회개혁, 극단적인 빈부 격차 등 갖가지 사회문제가 뒤엉켜 있었다. 츠바이크의 글은 이중적인 성규범이 낳을 수 밖에 없는 결과에 대한 고발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같은 탐구자가 생긴 것이고.

에곤 쉴레(1890∼1918)는 이런 분위기를 고발하고 바로 잡기 위해 도발하는 전략을 세운다. 모든 분야의 예술가에 대한 지나치리만큼의 존중이 관례인 사회에서 인체, 특히 자신과 여체를 성적인 면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연출한다. 자기현시적, 노출증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도발적이거나 격한 심리상태를 보여주고, 자위행위 중이거나 자위행위로 사정하는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20대 초반의 작품에 자주 보인다.

「튀는 젊은이」로서의 행동은 급기야 사고로 발전해서 1912년, 동네 주민들은 그가 뻔뻔스런 모델과 의심스러운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린 사람들을 유인해 옷을 벗긴다고 고발했다. 부녀 유혹과 유괴 혐의는 벗었지만, 민망한 그림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방치한 점은 죄라 하여 사람들 앞에서 작품 중 하나를 태우고, 며칠간의 수감형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사람이란 이런 무리도 하면서 커가고 사는 것. 그런 뒤 27세의 쉴레는 작업실 근처에 사는 그와 비슷한 중산층의 여성을 만나 결혼한다. 그는 쉴레를 진정시켜 성에 대한 강박을 없애주고 어른답게 만들었다. 1918년 초, 빈 분리파 미술가들은 쉴레에게 전시장의 중앙 큰 방을 내주었다. 훌륭한 아내와 만족한 생활을 보내던 그를 찾아온 성공과 임신 소식, 곧 마무리 될 1차대전의 상황은 그를 전과 달리 더없이 부드럽게 했다. 그러나 어쩌랴! 당시 빈을 휩쓴 유행성 독감에 아기를 가진 아내가 죽었고, 그도 사흘이 지나지 않아 같은 길을 따라갔다. 유작이 된 「가족」은 그러므로 불안정을 떨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미래에의 간절한 염원을 그린 그림이 되었다.<최석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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