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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망명과 북한/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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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의 망명과 북한/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특별기고)

입력
1997.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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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10월 도쿄(동경)에서는 북한당국의 후원 아래 이른바 「주체과학토론전국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넘어서는 「김일성주의」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주체사상은 결정적으로 독재자의 지배담론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주체사상 관련 토론회가 지난 1월 다시 도쿄에서 열렸으며 이 회의에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한 몫을 담당한 북한 사상계의 대부 황장엽이 참석하였다. 그는 이 회의가 끝난 뒤 베이징(북경)에서 남한으로의 망명을 신청하였다.주체사상을 교조화시킨 바로 그 도쿄에서 33년후 주체철학의 대부가 주체사상 토론을 마친 직후, 주체사상이 꽃피우고 있다는 「주체의 조국」을 버리고 주체사상 이론가들이 「식민지」로 규정한 바 있는 남한으로 망명을 시도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니러니를 연출한 황장엽이 밝힌 망명 동기는 「노동자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렇다면 황장엽의 망명이 북한체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마 그것은 그의 망명동기와 망명의 성공여부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그의 망명이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면 이는 북한권력 구조의 균열을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당장 체제동요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개인적인 동기나 업무수행상 하자 때문에 망명을 결행했다면 그 충격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가 북한 최고의 이데올로그였으며 북한권력의 핵인 노동당 비서국 비서였다는 점에서 북한체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경우 북한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중의 하나이자 자신의 핵심측근이 망명함으로써 이제 누구도 믿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리더십공황을 재촉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발생할 김정일의 비일관적인 결정이나 지시가 중앙집중적이며 수직적인 결정구조를 지닌 북한의 정책결정체계상 부처간, 부문간 걷잡을 수 없는 정책혼선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정책집단 사이에 정책공황을 야기시킬 가능성도 높다. 북한은 그동안 내부자원의 고갈속에서 대외관계의 확장을 생존전략으로 추진해 왔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서서 북한의 고위직 망명객 대부분이 대외관계 관련 인사들 중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의 대외담당 인사중 최고위직인 황장엽의 망명사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의 망명은 북한지도부가 체제위기의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하고 시도해온 대외관계 확장 전략이 지닌 위험성을 절감시켰을 것이다. 이는 북한의 정책집단에 「더 이상 쓸 정책이 없다」는 회의감과 좌절감을 낳게 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결국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은 정책에 대해 자신감을 잃고 좌충우돌하는 정책공황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황장엽의 망명은 다른 측면에서 북한이 이제 주체사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한계에 이르렀음을 웅변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그의 망명을 계기로 북한이 택해야 할 길은 과감한 개방과 개혁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망명은 거꾸로 북한권력집단 내 분위기를 쇄국과 보수주의로 몰고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결국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대외개방이라는 전략적 기조와 강경한 내부분위기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고, 이는 북한체제의 노선혼란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황장엽 망명 사건을 계기로 우리사회에는 북한 붕괴론의 물결이 거세게 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망명을 보고 곧 북한체제가 붕괴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직 성급한 판단이다. 오히려 황장엽의 망명은 우리가 북한체제의 내구력을 보다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풍부한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독붕괴의 경험때문에 「급작스러운 북한붕괴」를 머리속에 그리지만, 적어도 향후 1∼2년내에 그러한 일이 발생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직은 좀더 지켜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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