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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김덕홍 접촉 기업인 K모씨가 밝힌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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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김덕홍 접촉 기업인 K모씨가 밝힌 비화

입력
1997.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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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망명결심 밝혔다”/93년초 우리측에 모종의 메시지/95년 설립 여광무역 전초기지 활용/작년 “망명할수도…” 의사 전달/시기 엿보다 ‘남쪽변수’따라 결행한듯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는 지난해 5월부터 망명결심을 했고, 그동안 우리측과 망명결행과 관련, 지속적으로 교감을 가져온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북경)에서 황장엽의 심복 김덕홍 조선여광무역총회사 사장과 수십차례 접촉을 해온 기업인 K모(54)씨는 13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황비서의 망명은 북한에 자극을 줘 개방을 촉진시키겠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이뤄진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며 『다만 망명시기는 우리측과 조율한 흔적이 엿보인다』고 추정했다.

다음은 K씨의 설명을 토대로 엮은 황장엽비서의 망명과정에 얽힌 비화이다. 기업인 K씨는 지난 90년부터 중국 및 러시아에서 한국―중국―러시아―북한간 4각무역을 해왔다. 이념이 서로 다른 국가간 무역을 해야했기 때문에 자연히 북한을 비롯, 러시아 중국 등의 정보통들과 고급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다. K씨는 사업을 하다 우연히 황장엽에 대해 심상치않은 얘기를 전해들었다. 93년초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바로프스크 인근인 비아스크에는 김일성이 일제시대 빨치산 활동을 하다 만나 딸까지 낳았던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석조차 없는 무덤이었지만 김일성은 러시아내 벌목사령부를 시켜 보초병들까지 동원해 수십년동안 이 무덤을 지키도록 했다」

북한 내 최고위층들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이 여인의 정체와 무덤의 비밀은 바로 북한체제내의 실력자 황장엽이 제3자를 통해 현지에서 활동하던 우리측 정보기관에 넘겨줬다는 실로 믿지못할 내용이었다. 이 무덤에 관한 사연은 후에 국내 주요기관의 제보로 국내 한 월간지에 공개되기도 했다.

우리측은 이때 황장엽이 북한체제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모종의 거래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것으로 분석했다는 것이다. 황장엽은 이후에도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종종 남한의 경제인 종교인 등과 접촉하며 북한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게 될 것인지, 바람직한 통일방안을 무엇인지 비밀리에 토론을 벌인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 주체사상에 자본주의를 접목시켜야만 북한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황장엽은 김정일에게 『자본주의를 과감히 도입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했으나 군부세력들로부터 「반동적인 인물」로 낙인찍히는 결과만 초래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체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것으로 우리측은 분석, 황장엽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부터 황장엽은 『소신껏 일하다 안되면 최악의 상황을 택한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는게 정보소식통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북한이 95년초 베이징에 김덕홍을 대표로 여광무역 지점을 설립한 것은 명목상으로는 인력송출 및 수출입업무였지만 황장엽에게는 남한과의 정보교류를 위한 창구였다. 여광무역회사는 황장엽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김덕홍은 남한측 인사들과 빈번히 접촉하며 경제교류와 함께 북한내 동향정보를 건네줬다. 물론 황장엽도 심복인 김덕홍을 통해, 또는 본인이 직접 우리측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업상 거래」였다. 이런 점 때문에 황장엽이 이른바 「수정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정보통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다. 한때 정보통들 사이에는 심지어 북한의 젊은 엘리트들이 황장엽을 주축으로 러시아에 망명정부를 세우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마침내 황장엽은 지난해 초 베이징에서 중국을 무대로 사업을 하며, 탈북자들의 귀순 등을 도와온 기업인인 L씨를 만나게 됐다. 황장엽은 L씨가 함경도 원산출신으로 친형이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대위로 일했다는 말에 마음을 열었다. 그는 만난지 1시간도 안돼 『북한이 2000년이 되기 전에 망할 것이다. 북한이 망하면 탈북자들 때문에 한국도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L씨는 전했다. 황장엽의 이같은 심상치 않은 심경변화는 우리측에 즉각 감지됐다.

L씨와 몇차례 접촉한 황장엽은 지난해 5월께 『북한에 군부가 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개혁을 이룰 수 없다』며 『경우에 따라 망명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결심을 전했으며 그의 이같은 뜻은 우리측에 전달됐다.

우리측은 이때부터 황장엽으로 부터 간접적 경로를 통해 북한내 고급정보를 입수하기 시작했고, 「당분간 망명을 결행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지난해말부터 황장엽의 망명일정에 변수가 생겼다. 황장엽은 평양으로부터 「외화를 더 많이 벌어오라」는 압박을 받기 시작한것이다.

그러나 K씨는 『더욱 큰 변수는 남한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남한에서 발생한 노동법 및 안기부법 파문과 뒤이은 한보사태가 황장엽의 망명결행을 촉발시킨 것 같다는 것.

황장엽은 김정일 생일을 앞두고 외화벌이를 위해 일본을 떠나게 됐고 이 시기를 망명의 D데이로 잡았다. 황장엽이 일본에 쌀 원조를 부탁한 다음 귀환하던 길에 베이징에서 망명했지만, 상황이 허락했다면 일본에서 망명했을 것이라는게 K씨의 분석이다. 황장엽의 망명을 도운 L씨는 황장엽이 일본체류중 일본에 머물렀으며 현재는 제3국에 체류중이다.<박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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