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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이 서울 온다니”/서울의 동창·친척 놀라움속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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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이 서울 온다니”/서울의 동창·친척 놀라움속 환호

입력
1997.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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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남편이 “황 장군은 먼 친척”­94년에 사망한 황복연씨 가족/“평양상업학교때 이웃서 하숙”­동창 강기석옹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의 망명은 서울에 있는 친인척과 평양상업학교 동기생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황장엽의 망명소식이 알려진 12일 밤 반가움에 앞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장엽의 친인척은 강동구 하일동 중앙교회 황복연 목사. 황목사는 그러나 94년 지병으로 숨져 이날 하일동 352 교회사택에는 부인 신옥순(70)씨와 둘째 딸 성록(40)씨 부부만 있었다. 하오 6시 저녁뉴스를 보고 황장엽의 망명사실을 알게 된 신씨는 『생전 남편이 「북한에 황장엽 장군이라는 먼 친척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이렇게 갑자기 그가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통일원은 황목사가 황장엽과 4촌지간이라고 했으나 신씨는 『남편이 숨질때 남겨준 4촌 명단에 황장엽이라는 이름은 없었다』며 『친척은 맞지만 정확한 촌수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신씨에 따르면 51년 1·4후퇴때 북한에 부인과 아들 학구(51) 항구(48)씨를 남겨두고 단신 월남한 황목사는 대한신학교를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았다. 3남 2녀중 막내인 황목사는 아들 부모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숨지기 전 5년동안 둘째 형 승연씨의 아들 원구(48·함남 함흥시 거주)씨와 10여차례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과 부모의 생사여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딸 성록씨는 『황장엽 장군이 우리 가족과 얼마나 가까운지 모르지만 그 분의 망명은 개인적으로나 민족통일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라며 기뻐했다.

황장엽과 평양상업학교 7회 동기생인 강기석(79·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씨도 크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옹은 『장엽이가 망명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며 『한시 바삐 장엽이를 보고 싶다』고 반가워했다. 평양상업학교 재학 당시 황장엽과 이웃해 하숙을 했던 강옹은 『그는 학창시절 대단한 노력파에다 결단력있는 학생이었다』며 『장엽이가 망명한 것을 보면 북한도 곧 무너질 때가 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강옹은 『지주의 아들로 상류층 자제였던 그가 공산당원이 된 뒤 주체사상의 대가로 북한 최고위층이 된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강옹에 따르면 황장엽은 평남 강동군 승호리에서 면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형도 일본 메이지(명치)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인텔리집안 출신이었다.

강옹은 『황장엽은 학창시절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다」며 솔잎 등으로 생식을 할 만큼 기인이었다』며 『그는 한 번 마음먹으면 2∼3일씩 밤을 새며 공부를 할 만큼 학문에 열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강옹은 평양상업학교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며 황장엽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느라 밤을 지새웠다.<윤순환·정진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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