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간다” 감시원 따돌려/눈길쏠린 대사관 대신 총영사관 직행/한인전용문 들어가 “내가 황장엽이오”황장엽(74)의 망명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과 장소에서 발생한 북한정권 출범이후 최대의 망명사건이다. 황은 망명전 일본에 체류하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활동으로 북한당국을 감쪽같이 속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공식일정이 빡빡하고 조총련 등에 의해 행동이 완전히 노출되는 일본보다는 일정이 느슨한 귀국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북경)을 망명장소로 택했다. 감시가 집중된 주중 한국대사관 대신 비교적 감시가 허술한 베이징총영사관을 택한 데서도 그의 치밀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망명상황◁
망명은 11일부터 시작됐다.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11일까지 일본에 체류했던 황은 이날 하오 5시께 주중 북한대사관직원의 영접을 받으며 베이징에 도착, 북한대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어 황은 95년부터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김덕홍을 불러 조심스럽게 망명의사를 전달했다. 김은 황이 이사장으로 있는 국제평화주체재단 총재이며 황과 함께 대외경제사업을 추진해와 사상면으로나 업무적으로나 황의 심복중 심복. 김은 황의 망명의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심복답게 망명에 선뜻 동의했다. 그러나 이번 망명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는 점을 들어 황의 망명 이전에 김이 베이징 현지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관측도 나온다.
▷망명결행◁
12일 아침.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한 황은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김이 황의 방으로 찾아 왔다. 두사람은 대사관에서 아침식사를 한뒤 9시30분께 『백화점에 들러 귀국선물을 구입하겠다』고 말한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이들이 쉽게 북한대사관의 감시망을 빠져나왔던 것은 하오 2시 평양으로 출발하기앞서 12시까지 황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승용차편으로 북한대사관에서 2.5㎞ 떨어진 차오양취(조양구) 산리툰(삼리둔)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으로 직행했다. 황은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한국인전용문을 통해 총영사관으로 들어가 면회를 신청, 남상욱 총영사를 만났다. 황은 긴장된 목소리로 『여기가 한국대사관이냐』이라고 물었고 남총영사는 『누구냐』고 응답했다. 이어 황은 『내가 황장엽이오』라며 신분증을 제시, 신분을 확인시킨뒤 남총영사의 2층 방으로 향했다. 2층에 올라온 황은 『나는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다』고 요청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부조치◁
망명의사를 접수한 총영사관은 즉시 정종욱 주중대사에게 직통전화로 보고했고 주중대사관은 본국에 이를 긴급타전했다. 이후 총영사관은 경비강화를 중국측에 요청, 평소 경비인력의 10배가 넘는 50여명이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채 총영사관을 삼엄하게 에워쌌다. 본국보고, 경비강화는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움직임이었다. 외무부본부도 긴급회의를 열고 정부대표단 베이징 파견을 결정하는 등 즉각적인 대응태세를 갖추었고 정부는 권오기 통일부총리 주재로 통일안보조정회의를 열어 북한의 동향을 점검하고 황장엽의 망명수용을 결정했다.<이영섭 기자>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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