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안락의자·탁자 그리고 전화기만 놓인 한평의 공간/벨이 울리면 낯 모르는 상대와 서로의 정체를 감춘채 대화를 나눈다/야릇한 만남을 꿈꾸기 때문일까 단지 얘기가 하고 싶어서일까/‘가족해체’ 따른 외로움의 탈출구라는 분석도 있지만/‘찰칵’ 통화가 끝나는 순간 더 큰 고독이 찾아올수도 있는데지하에는 노래방, 1층은 24시간 편의방, 2층은 비디오방, 맨 꼭대기층은 찜질방.
온통 방이다. 골목마다 즐비한 방… 방… 방…. 도시는 방의 거대한 집합소인가? 아니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방인가? 사람들은 도시의 방에서 즐기고 탐닉하고 소비한다. 혼자, 아니면 여럿이.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휴식한다.
방의 문화에 전화방이 가세했다. 방이 대체로 혼자만의, 또는 혼자의 성격을 갖는 공간이라면 전화방은 방의 결정판이다.
10일 하오 9시. 서울 신촌에 있는 전화방 「텔리라인」. 입구에 두 세명의 남자가 서성이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16개나 되는 방이 모두 찼다. 카운터에 있는 전화기 벨은 쉬지 않고 울린다.
『텔리라인입니다. 어떤 연령층을 원하십니까? 30대요? 그러면 5번방에 연결하겠습니다. 한번 통화해 보세요』
낮게 깔린 조명, 한쪽 벽에는 포옹하는 남녀의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다. TV, 안락의자, 조그마한 탁자가 한 평 남짓한 공간을 채우는 전부이다. 탁자 위. 손님을 기다리는 전화기 1대가 성인잡지들과 함께 놓여 있다.
안락의자에 몸을 누이고 눈으로 비디오 화면을 좇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기 저쪽에는 낯모르는 이성이 기다리고 있다. 서로가 전화기를 들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이 세상의 무슨 얘기든지 나눌 수 있다.
전화방. 콘크리트 도시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익명의 섬. 완벽하게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숨을 수 있는 곳. 그리고 목소리로 만날 수 있는 곳.
사람들은 왜 한 평 공간에 파묻혀 밤을 새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가? 마치 연극 속의 주인공처럼.
고독해서? 생활이 공허해서? 누구라도 붙잡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야릇한 만남을 꿈꾸며?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요』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 마땅한 상대가 없어요. 이야기만 통하면 누구라도 괜찮은 거 아닌가요?』 『약속시간도 좀 남았고… 10대들이 많은 비디오방은 들어가기가 좀 쑥스럽더라구요』 『멋진 만남이 이루어질지 혹시 아나요?』
이 업소 관계자에 따르면 하루 150여 명의 남자손님이 찾는다. 1만원을 내면 1시간 동안 방에 머무를 수 있다.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여성의 수는 남자 손님보다 세배 가량 많다. 방에 들어간 남자는 1시간 동안 서너차례 낯모르는 여성의 전화를 받게 된다. 남녀 모두 10대 보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40대까지가 주로 이용한다. 아무래도 낮시간대 보다는 밤시간대 전화가 붐빈다.
관련기관에 따르면 최근 전국에 16개의 전화방이 생겨났다. 실제로는 50여곳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달 3일 문을 연 「텔리라인」은 이미 대여섯 군데와 체인점 계약을 맺었다.
아직까지는 호기심으로 전화를 걸거나, 전화방을 찾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텔리라인 대표 차평섭(38)씨는 『문을 연지 한달 조금 넘었는 데 단골이 많다』고 말했다. 단순한 한 번의 호기심이 아닌 중독증세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씨는 전화방은 「가족 해체」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고독감이 만들어낸 기형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씨는 『서구사회처럼 사교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의 경우 가족이 그 몫을 대신해왔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되면서 혼자 내버려진 많은 사람들이 대화에 목말라하고 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진단했다.
광혜병원 신승철 원장은 가족 해체라는 원인와 함께 도피심리 또는 퇴행심리를 전화방을 찾는 이유로 꼽았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출 수 있기에 부끄러운 약점까지도 쉽게 드러낼 수가 있다. 꼭꼭 눌러 두고 있었던 것을 속시원히 털어내 위안을 얻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전화방을 찾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미 서너차례 낯선 남자와 통화한 적이 있다는 한 주부. 30대 후반으로 인천에 산다는 그는 『아이와 남편이 있지만 혼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아이들이 잠자고 남편의 귀가가 늦을 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전화방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강하지만 대면접촉에 두려움을 가진 이들의 욕구해소 창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보잘 것 없는 외모 나 조건때문에 이성교제에 자신이 없는 이들에게 전화방은 매력적인 대리만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전화방이 번져 나가면서 불건전한 공간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크다. 일본의 경우처럼 「폰 섹스」나 부도덕한 만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성이라는 요소가 전화기를 들게 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바로 그 익명성 때문에 대화 내용이 인간의 본능적 부분으로 흘러가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 적지않은 사람들이 지나친 성적 농담이나 만나자는 제의를 하기도 한다. 회사원 김모(32)씨는 『서로 성격이 맞는 것 같아 만나자고 마음을 떠 보았더니 상대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말했다. 또다른 김모(29)씨는 『진한 대화까지 별 스스럼 없이 통해 서로 호출번호를 주고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현대인이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을 앓고 있다면 전화방은 남몰래 고독을 치유하는 최적의 장소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칵』 전화기를 내려 놓는 순간, 고독은 어김없이 재발할 것이다. 아니 더 큰 고독으로 다가올 것이다.<최성욱 기자>최성욱>
◎만화방·노래방·비디오방·편의방… ‘방’ 전성시대/거주공간의 기능 떠나 놀이·혼자만의 공간으로/유행의 확대재생산 우리사회 밀실문화 반영/시대의 또다른 거울이지만 ‘일본문화의 변종’ 시각도
만화방에서 전화방까지. 방은 시대에 따라, 세태를 좇아 수없이 모습을 달리해왔다. 방은 그래서 시대의 또다른 거울이다.
그야말로 별의 별 방이 다 생겨나고 있다. 번성하는 방의 문화는 방의 놀이적 의미와 무관한 공간들까지 방이라는 이름의 대열에 합류시키고 있다. 머리방, 찜질방 심지어 빨래방까지. 방의 전성시대다.
대학생 정모(23)씨의 방순례. 수업이 끝난 후 그의 나머지 하루는 방에서 흘러간다. 머리방에서 커트를 하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친구들과 헤어진 후에는 비디오방에 간다. 비디오 두어 편을 보고나면 자정. 그는 24시간 편의방에 들러 라면으로 공복을 채우고 맥주 몇 병을 사들고는 하숙방으로 돌아온다.
방의 사전적 의미는 공간이다. 거주공간으로서의 방이 그 고전적 개념이 될 것이다. 그곳은 가족이 있고 인간의 정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방은 집을 떠났다. 더이상 거주공간으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놀이공간으로서, 또는 혼자만의 공간으로서 방의 의미는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각종 방의 탄생은 놀이문화, 휴식문화의 양태를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 방인 노래방과 비디오방. 96년 말 현재 전국의 노래방은 2만여개, 비디오방은 2,600여개(무허가 포함 3,300여개 추산). 최근에 생겨나는 신종 방은 편의점과 맥주집을 결합한 24시간 편의방, 전화방,허기를 때우는 요기방 등이다.
『편하잖아요, 남들 눈치 안봐도 되고 값도 싼 편이라 부담도 없어요. 1만원짜리 달랑 두 장에 실컷 즐길 수 있는 데가 여기 말고 또 있나요』 여대생 최모(21)씨의 노래방 옹호론이다.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가족 단위로도 즐길 수 있는 점이 또한 노래방의 장점이다.
비디오방과 전화방. 노래방과의 차이라면 혼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 비디오방은 남녀 한 쌍의 은밀한 공간으로도 이용돼 청소년의 탈선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크다.
이렇듯 방은 대체로 혼자만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노래방, 단란주점도 여럿이 모여 간다 하지만 결국 즐기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개인적 공간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각종 방은 대체로 일본 문화의 변종이다. 노래방의 원조는 일본의 「가라오케」. 전화방은 일본에서 성행하는 「테레쿠라」이다. 일본의 전화방 중에는 여성을 고용해 서로의 얼굴이나 신체를 비디오를 통해 보면서 대화하는 일종의 「핍쇼(Peep Show)」까지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여기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어떤 모습의 방이 탄생할 지 모를 일이다.
방 문화의 유행은 우리 사회·문화 전반의 밀실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문화평론가 손동수(31)씨는 『서구 문화가 기본적으로 대화형·광장문화라면, 우리 문화는 독백형·밀실문화에 가깝다』고 말한다. 각종 방의 유행은 『맘껏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문화공간을 확보하려는 개인적인 욕구와, 이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의 「닫힌」 문화상황 간의 갈등이 빚어내는 문화현상』이라는 것이다.<황동일 기자>황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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