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신한국이 아니다. 신한국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아니다.이것은 구한국이다. 구한국에서 몇걸음도 더 나아온 것이 없다.
김영삼정부가 출범하면서 외친 「신한국 건설」이라는 구호에 국민들은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새로운 나라가 되려나 보다 했다. 집권 여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꿀 때까지만 해도 이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말끝마다 「개혁」이었으므로 나라는 개혁되어 가고 있는 줄로 믿고 싶었다. 귀가 닳도록 「문민정부」라는 말이 강조되었으므로 문민의 이름이면 독재말고는 못해낼 것이 하나도 없는 줄로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던가.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한보사태는 「신한국」의 결산이다. 김영삼정부의 집권 마지막 해에 들어서면서 일찌감치 결산이 나오고 있다. 좀 이르다 싶은 결산은 더 두고 계산했자 총계가 나아질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보사태는 돌발적인 사건도 아니요 국부적인 문제도 아니다. 신한국 정부의 집권동안 내내 지속되어 온 것이 표출되었을 뿐이요 총체적인 것이 단면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온 국민이 넋을 잃는 것도 5조원이라는 액수의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설마했던 발본되지 않은 뿌리의 크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허탈을 무엇으로 달래줄 것인가. 신한국 말고 무슨 한국으로 새로 도색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에 달렸고 모든 것이 정치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나라 사회악 또한 원죄가 정치에 있다. 정치판이 썩으니 모든 것이 다 썩는다. 선거 하나만 해도 그렇다. 금권선거가 국민정신을 타락시킨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게다가 그런 불법선거를 단호히 법대로 단죄하지 못하고 이만하면 공명선거라고 자부하면서 팔짱끼는 정부의 눈 감은 자세가 정치인의 간을 키웠다. 어찌 무슨 돈이고 안심하고 먹지 않겠는가. 정치인의 부정한 돈은 모두 선거 등을 통해 국민을 부패시키는 최부제가 된다. 청결한 정치없이 사회의 방부는 어렵다.
한보의 더러운 돈들은 설령 그것이 떡값이라고 하자. 정치인의 떡값은 아무리 커도 한조각의 떡값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직접적인 청탁으로 포장되지 않는 나전은 뇌물이 아니라는 생각, 이런 통념들이 오랫동안 정치인의 죄감각을 마비시켜 왔다. 이것이 죄가 된다고 단정한 것이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런 악습의 시대를 청산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단죄에 소리높였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자기 차례가 되니 그것이 무슨 죄냐고 한다. 검찰조차 대가성없는 돈을 어떻게 처벌하느냐고 딴 소리를 한다. 정부의 의지가 얕보일 수 밖에 없다. 「포괄적 뇌물」 아닌 떡값은 없다.
애초부터 무리였다. 사람은 그대로 두고 의식만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 잘못이었다. 건국이래 줄곧 병들어온 정치판의 악취나는 풍토를 신한국이라는 경구약같은 구호 하나로 달랑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이 안이한 생각이었다.
떡값이건 고물값이건, 큰 돈이건 작은 돈이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열명이건 스무명이건, 검은 돈에 연루된 정치인들은 이번 기회에 예외없이 정치판에서 쓸어내야 한다. 악질의 병소를 하나하나 일소해 나가야 한다. 정치판의 대청소를 시작할 때다.
집권 여당에서는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당내 정풍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당 운영의 쇄신만으로는 안된다. 정치풍토가 일신되어야 한다. 한 정당만으로는 안된다. 정치권 전체가 혁신되어야 한다.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 큰 바람이 불어야 한다. 대정풍 운동이 요청된다. 대청소를 위해서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자. 대환기가 필요하다.
한보뿐이겠는가. 다 들추어내야 한다. 그래서 구정치는 물러가고 새 정치가 들어와야 한다. 정치는 새 판을 짜야 한다. 구질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로 새로운 정치질서의 틀을 만들어가는 수 뿐이다. 설령 그것이 아마추어들의 정치판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마추어의 정치가 다소 불안하더라도, 병든 프로의 정치에 나라가 망해가는 불안보다는 훨씬 안전하다.
위기라고들 한다. 부정부패와의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분명히 위기다. 사건은 기회를 낳는다. 지금이 찬스일 수도 있다. 정치판을 청소할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큰 나라로 가는 길위에 서 있다. 이대로는 절대로 큰 나라가 되지 못한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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